영화
[스크랩] 숨
JOOFEM
2008. 11. 22. 00:07
숨
감독 : 김기덕
주연 : 장첸 하정우 지아 김기덕
제작년도 : 2007년

김기덕은 김기덕이지만 확실히 변해가고 있다. 영화는 감독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가 처음 영화를 만들던 1996년에 세계를 바라보던 눈과 2007년의 눈이 같을 수는 없다. 나이가 들면서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아무 것도 없던 사람이 많은 부와 명예를 쥐기도 한다. 그러니 세계를 보는 눈이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김기덕이 세상과 타협했다, 혹은 변질됐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서 혼자 우뚝 서 있는 바위는 물살을 방해하며 그 위를 흐르는 배를 전복시킬 뿐이다. 수평적으로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는 바위가 유용할 수 있겠지만 수직적으로 진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방해물이 된다. 똑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꼭 옳은 일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의 열네번째 영화 [숨]은 변화해가고 있는 김기덕의 모습을 보여 준다. 관객들이 보는 사람은 장첸이나 하정우 혹은 지아가 연기하는 극중 인물들이지만, 이미 김기덕이 만든 열 네 편의 영화를 본 우리들은 한 영화작가의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김기덕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후반부에서 20분동안 스님으로 나와 모자 벗은 맨머리를 보여주며 자신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한 적이 있지만, [숨]에서도 배우로 등장을 한다.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역할도 아니다. 등장인물들 모두를 바라보는, 일종의 창조자로서의 전지적 시점을 그는 관객들에게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김기덕이 연기하는 교도소 보안과장은, 면회소를 찾아 오는 연이나, 면회소 안에서 장진과 만나는 연, 면회소 밖에 있는 연의 남편이나 아이를 모두 감시 카메라를 통해 모니터로 바라본다. 그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 속의 인물을 창조자로서 바라보겠다는 의지고, 관객에 대한 그 의지의 드러냄이다. 감독 본인 스스로 [숨]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속편 격이라고 말하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살해하고 사형이 확정된 사형수가, 사형을 일주일 남겨 놓고 날카로운 송곳(사실은 칫솔대를 벽에 갈아 뾰죽하게 만든 흉기)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한다. 남편의 거듭되는 외도에 지쳐있던 조각가 연(지아 분)은 TV에서 그 뉴스를 보고 호기심을 느낀다. 연은 왜 TV 뉴스만을 보고 생면부지의 그 남자, 장진(장첸 분)을 면회가는 것일까? 김기덕 감독의 인물들은 항상 벼랑 끝에 서 있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리는 이유도 오직 하나,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서로의 공통점이 통했기 때문이다. 장진이 왜 가족들을 살해했는지 연이 왜 장진을 사랑하는지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일상적 리얼리즘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있다. 가령 이창동이 [오아시스]에서 묘사한 정치한 현실인식이나 홍상수 영화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하이퍼 리얼리즘이 김기덕의 영화에는 없다. 김기덕은 자신의 상상공간 안에 인물들을 배치해 놓고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끌어 낸다. 그의 영화는 사실성을 강조하려고 할수록 초현실적이 된다. 한강 다리밑 깊은 물 속의 방(악어)이나 한 여름에 내리는 눈(파란대문), 혹은 목구멍이나 질 속으로 낚시바늘 뭉치를 집어 넣고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기는 자해(섬)나 고양이 꼬리에 색색의 물감을 묻혀 쓰는 반야심경(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릭고 봄) 같은 장면들이 김기덕 영화에서는 낯설지 않다. 그것은 김기덕이 영화를 현실의 반영체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예술가의 창조적 매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형수 장진이 면회실에서 수갑찬 팔을 들어 연을 두 팔로 안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일반적인 포옹과는 다르다. 장진의 묶인 팔 안에 연이 있음으로써 두 사람은 하나가 된다. 죽음 앞에 서 있으면서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원하는 남자, 부유한 집에 살고 있지만(연이 거주하는 집은 파주 헤이리에서 촬영된 예술가촌에 있는 스튜디오다. 녹슨 철판으로 만들어진 4층 높이의 모던한 건축물과 내부의 인테리어, 연의 남편이 타고 다니는 크라이슬러 JEEP은 그들의 생활수준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남편의 외도로 극도의 소외감을 느끼는 여자, 그들은 절망감과 소외감이라는 공통분모로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묻지 말자. 어떻게 사형수가 여자 면회인과 방 안에서 만나 포옹할 수 있는지, (나중에 두 사람은 교도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섹스까지 한다), 또 그들이 만나는 면회소의 벽지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바뀌어져 가는지, 이런 설정을 리얼리즘의 잣대로 재단하면 김기덕의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 김기덕 영화가 갖는 아름다움의 절정은 내러티브의 전개가 아니라, 현실을 뛰어 넘는 초현실, 일상을 탈출하는 비일상의 영역에서 창조된다.
[숨]은 장진과 연의 이야기지만 연의 남편(하정우 분)과 어린 죄수(강인형 분)가 그들 주변에 등장해서 이야기에 풀무질을 하고 평면적 관계를 입체적으로 변모시킨다. 연은 넘편의 차 안에서 다른 여자의 머리띠를 발견한다. 연은 그 머리띠를 자신의 머리에 착용하고 남편을 본다. 가장 김기덕적인 장면이다. 예전의 김기덕이었다면 연과 연의 남편은 끔찍한 파국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는 엽기적 방법의 살인이라든가 복수가 당연히 등장했겠지만, 지금의 김기덕은 화해를, 사랑을, 용서를, 속죄를 이야기한다.
자신도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을테니 너도 사형수를 만나지 말라는 연의 남편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연이 장진을 만나러 가자, 마지막에는 연의 남편이 직접 자신의 차에 연을 태우고 아이와 함께 교도소까지 연을 데려다 주기도 한다. 연이 장진과 마지막 섹스를 하는 동안, 교도소 밖에서 아이와 눈싸움을 하며 기다린다. 이것은 세상과의 화해를 드러내는 김기덕식 표현이다.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연과 연의 남편이 함께 [눈이 내리네]를 한 소절씩 교대로 부르는 것은 단절과 미움이 아니라 소통과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숨]을 통해 궁극적으로 김기덕 감독이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장진과 연, 연의 남편과 어린 죄수는 각각 주인공 남녀를 꼭지점으로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사형수 장진을 꼭지점에 두고, 장진을 사랑하는 동성의 어린 죄수, 장진을 사랑하는 유부너 연이 하나의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고, 연을 꼭지점에 두고 장진과 연의 남편이 있다. 연의 남편이 만나는 여자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손만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구태여 또 하나의 갈등 축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간 연의 남편은 집으로 찾아온 자신의 여자와 마주친다. 밖에 서 있는 그 여자의 손이 연의 남편의 뺨을 치는 장면을 실내에서 잡은 이유는, 삼각형의 갈등구조를 최소화하고 집중을 주기 위해서이다.
김기덕 영화는 언제나 물의 상상력이 지배하고 있다. 김기덕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다. 장진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는 일종의 섬이다. 세상은 물로 되어 있다. [숨]이 비록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4계절을 담아내려고 하고 있지만 외형적으로 보이는 세계는 눈이 내리는 겨울이다. 눈은 그들의 갈등과 고통을 덮어버리고 새출발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름 바다 사진으로 둘러 쌓인 교도소 안을 보라. 그들은 분명히 물 속에 있다. 그런가 하면 가을의 붉은 단풍으로 뒤덮인 면회실도 역시 꽃의 바다 속에 그들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기덕의 영화는 스스로가 창조한 이미지를 항상 반복하면서 자기 복제한다. 그러나 단순 반복은 아니다. 김기덕이 작가로서 위대한 점은 스스로가 창조한 이미지들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주고 변주하며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이 김기덕 이미지의 핵심이라면, [반복과 차이]야말로 김기덕 상상공간 속의 이미지를 변주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다.
[숨]은 눈으로 덮인 세계, 눈의 이미지가 제시하는 다양한 의미망을 변주하며 전개된다. 눈이 내려서 얼어붙으면 빙판길이 된다. 삶을 비틀거리며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눈이 녹아서 물이 되면 그들은 하나가 된다. 또 흰 눈은 내려서 세계의 날카로운 경계를 지워버린다. 김기덕은 장진과 연과 연의 남편이 각각 갖고 있는 그들의 상처를 눈을 통해 덮어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약속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교도소 보안과장으로서 전지적 시점으로 모니터를 통해 그들 모두를 지켜보고 있는 그가 그들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바로 눈이 아닐까?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작가인 김기덕이 내려주는 것이다.
교도소 내부의 수감자들 사이에 등장하는 동성애는 교도소 밖에서의 연의 남편의 외도와 대응한다. 장진을 사랑하는 어린 죄수는 다른 동료 죄수들의 폭행으로부터 항상 장진을 감싼다. 동성애 문제가 사실 김기덕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두 주인공인 탈북 청년과 남한 청년의 우정은 우정 이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함께 수갑을 차고 바다 속에 던져졌다가 살아나오기도 한다. 마지막 씬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도 여전히 한쪽 팔에 수갑을 차고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파란 대문]에서 사창가 새장여인숙의 포주 딸인 여대생(이혜은 분)과 그 집의 창녀(이지은 분)는 처음에는 갈등을 빚지만 나중에는 아픈 창녀를 대신해서 여대생이 손님 방에 들어갈 정도로 두 여자 사이의 짙은 동성애적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사마리아]에서 두 여고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남자와 섹스를 하고 나온 여고생의 알몸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친구도 동성애적 감성을 풍긴다.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오해 중의 하나가 김기덕 영화가 마초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의 영화는 상처 받은 짐승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항상 여성의 자궁으로 귀환하려는 자궁회귀의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장진에게는 죽음이 어머니의 자궁이다. 세상에 나와 상처 받은 그는, 사형을 기다리는 것보다 자기 손으로 죽음을 향해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려고 한다. 죽음이야말로 생명이 새로 태어나고 다시 돌아가는 거대한 자궁의 문이 아니겠는가?
감독 : 김기덕
주연 : 장첸 하정우 지아 김기덕
제작년도 : 2007년

김기덕은 김기덕이지만 확실히 변해가고 있다. 영화는 감독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가 처음 영화를 만들던 1996년에 세계를 바라보던 눈과 2007년의 눈이 같을 수는 없다. 나이가 들면서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아무 것도 없던 사람이 많은 부와 명예를 쥐기도 한다. 그러니 세계를 보는 눈이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김기덕이 세상과 타협했다, 혹은 변질됐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서 혼자 우뚝 서 있는 바위는 물살을 방해하며 그 위를 흐르는 배를 전복시킬 뿐이다. 수평적으로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는 바위가 유용할 수 있겠지만 수직적으로 진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방해물이 된다. 똑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꼭 옳은 일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의 열네번째 영화 [숨]은 변화해가고 있는 김기덕의 모습을 보여 준다. 관객들이 보는 사람은 장첸이나 하정우 혹은 지아가 연기하는 극중 인물들이지만, 이미 김기덕이 만든 열 네 편의 영화를 본 우리들은 한 영화작가의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김기덕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후반부에서 20분동안 스님으로 나와 모자 벗은 맨머리를 보여주며 자신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한 적이 있지만, [숨]에서도 배우로 등장을 한다.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역할도 아니다. 등장인물들 모두를 바라보는, 일종의 창조자로서의 전지적 시점을 그는 관객들에게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김기덕이 연기하는 교도소 보안과장은, 면회소를 찾아 오는 연이나, 면회소 안에서 장진과 만나는 연, 면회소 밖에 있는 연의 남편이나 아이를 모두 감시 카메라를 통해 모니터로 바라본다. 그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 속의 인물을 창조자로서 바라보겠다는 의지고, 관객에 대한 그 의지의 드러냄이다. 감독 본인 스스로 [숨]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속편 격이라고 말하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살해하고 사형이 확정된 사형수가, 사형을 일주일 남겨 놓고 날카로운 송곳(사실은 칫솔대를 벽에 갈아 뾰죽하게 만든 흉기)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한다. 남편의 거듭되는 외도에 지쳐있던 조각가 연(지아 분)은 TV에서 그 뉴스를 보고 호기심을 느낀다. 연은 왜 TV 뉴스만을 보고 생면부지의 그 남자, 장진(장첸 분)을 면회가는 것일까? 김기덕 감독의 인물들은 항상 벼랑 끝에 서 있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리는 이유도 오직 하나,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서로의 공통점이 통했기 때문이다. 장진이 왜 가족들을 살해했는지 연이 왜 장진을 사랑하는지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일상적 리얼리즘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있다. 가령 이창동이 [오아시스]에서 묘사한 정치한 현실인식이나 홍상수 영화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하이퍼 리얼리즘이 김기덕의 영화에는 없다. 김기덕은 자신의 상상공간 안에 인물들을 배치해 놓고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끌어 낸다. 그의 영화는 사실성을 강조하려고 할수록 초현실적이 된다. 한강 다리밑 깊은 물 속의 방(악어)이나 한 여름에 내리는 눈(파란대문), 혹은 목구멍이나 질 속으로 낚시바늘 뭉치를 집어 넣고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기는 자해(섬)나 고양이 꼬리에 색색의 물감을 묻혀 쓰는 반야심경(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릭고 봄) 같은 장면들이 김기덕 영화에서는 낯설지 않다. 그것은 김기덕이 영화를 현실의 반영체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예술가의 창조적 매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형수 장진이 면회실에서 수갑찬 팔을 들어 연을 두 팔로 안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일반적인 포옹과는 다르다. 장진의 묶인 팔 안에 연이 있음으로써 두 사람은 하나가 된다. 죽음 앞에 서 있으면서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원하는 남자, 부유한 집에 살고 있지만(연이 거주하는 집은 파주 헤이리에서 촬영된 예술가촌에 있는 스튜디오다. 녹슨 철판으로 만들어진 4층 높이의 모던한 건축물과 내부의 인테리어, 연의 남편이 타고 다니는 크라이슬러 JEEP은 그들의 생활수준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남편의 외도로 극도의 소외감을 느끼는 여자, 그들은 절망감과 소외감이라는 공통분모로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묻지 말자. 어떻게 사형수가 여자 면회인과 방 안에서 만나 포옹할 수 있는지, (나중에 두 사람은 교도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섹스까지 한다), 또 그들이 만나는 면회소의 벽지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바뀌어져 가는지, 이런 설정을 리얼리즘의 잣대로 재단하면 김기덕의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 김기덕 영화가 갖는 아름다움의 절정은 내러티브의 전개가 아니라, 현실을 뛰어 넘는 초현실, 일상을 탈출하는 비일상의 영역에서 창조된다.

[숨]은 장진과 연의 이야기지만 연의 남편(하정우 분)과 어린 죄수(강인형 분)가 그들 주변에 등장해서 이야기에 풀무질을 하고 평면적 관계를 입체적으로 변모시킨다. 연은 넘편의 차 안에서 다른 여자의 머리띠를 발견한다. 연은 그 머리띠를 자신의 머리에 착용하고 남편을 본다. 가장 김기덕적인 장면이다. 예전의 김기덕이었다면 연과 연의 남편은 끔찍한 파국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는 엽기적 방법의 살인이라든가 복수가 당연히 등장했겠지만, 지금의 김기덕은 화해를, 사랑을, 용서를, 속죄를 이야기한다.
자신도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을테니 너도 사형수를 만나지 말라는 연의 남편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연이 장진을 만나러 가자, 마지막에는 연의 남편이 직접 자신의 차에 연을 태우고 아이와 함께 교도소까지 연을 데려다 주기도 한다. 연이 장진과 마지막 섹스를 하는 동안, 교도소 밖에서 아이와 눈싸움을 하며 기다린다. 이것은 세상과의 화해를 드러내는 김기덕식 표현이다.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연과 연의 남편이 함께 [눈이 내리네]를 한 소절씩 교대로 부르는 것은 단절과 미움이 아니라 소통과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숨]을 통해 궁극적으로 김기덕 감독이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장진과 연, 연의 남편과 어린 죄수는 각각 주인공 남녀를 꼭지점으로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사형수 장진을 꼭지점에 두고, 장진을 사랑하는 동성의 어린 죄수, 장진을 사랑하는 유부너 연이 하나의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고, 연을 꼭지점에 두고 장진과 연의 남편이 있다. 연의 남편이 만나는 여자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손만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구태여 또 하나의 갈등 축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간 연의 남편은 집으로 찾아온 자신의 여자와 마주친다. 밖에 서 있는 그 여자의 손이 연의 남편의 뺨을 치는 장면을 실내에서 잡은 이유는, 삼각형의 갈등구조를 최소화하고 집중을 주기 위해서이다.
김기덕 영화는 언제나 물의 상상력이 지배하고 있다. 김기덕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다. 장진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는 일종의 섬이다. 세상은 물로 되어 있다. [숨]이 비록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4계절을 담아내려고 하고 있지만 외형적으로 보이는 세계는 눈이 내리는 겨울이다. 눈은 그들의 갈등과 고통을 덮어버리고 새출발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름 바다 사진으로 둘러 쌓인 교도소 안을 보라. 그들은 분명히 물 속에 있다. 그런가 하면 가을의 붉은 단풍으로 뒤덮인 면회실도 역시 꽃의 바다 속에 그들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기덕의 영화는 스스로가 창조한 이미지를 항상 반복하면서 자기 복제한다. 그러나 단순 반복은 아니다. 김기덕이 작가로서 위대한 점은 스스로가 창조한 이미지들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주고 변주하며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이 김기덕 이미지의 핵심이라면, [반복과 차이]야말로 김기덕 상상공간 속의 이미지를 변주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다.

[숨]은 눈으로 덮인 세계, 눈의 이미지가 제시하는 다양한 의미망을 변주하며 전개된다. 눈이 내려서 얼어붙으면 빙판길이 된다. 삶을 비틀거리며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눈이 녹아서 물이 되면 그들은 하나가 된다. 또 흰 눈은 내려서 세계의 날카로운 경계를 지워버린다. 김기덕은 장진과 연과 연의 남편이 각각 갖고 있는 그들의 상처를 눈을 통해 덮어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약속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교도소 보안과장으로서 전지적 시점으로 모니터를 통해 그들 모두를 지켜보고 있는 그가 그들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바로 눈이 아닐까?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작가인 김기덕이 내려주는 것이다.
교도소 내부의 수감자들 사이에 등장하는 동성애는 교도소 밖에서의 연의 남편의 외도와 대응한다. 장진을 사랑하는 어린 죄수는 다른 동료 죄수들의 폭행으로부터 항상 장진을 감싼다. 동성애 문제가 사실 김기덕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두 주인공인 탈북 청년과 남한 청년의 우정은 우정 이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함께 수갑을 차고 바다 속에 던져졌다가 살아나오기도 한다. 마지막 씬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도 여전히 한쪽 팔에 수갑을 차고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파란 대문]에서 사창가 새장여인숙의 포주 딸인 여대생(이혜은 분)과 그 집의 창녀(이지은 분)는 처음에는 갈등을 빚지만 나중에는 아픈 창녀를 대신해서 여대생이 손님 방에 들어갈 정도로 두 여자 사이의 짙은 동성애적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사마리아]에서 두 여고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남자와 섹스를 하고 나온 여고생의 알몸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친구도 동성애적 감성을 풍긴다.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오해 중의 하나가 김기덕 영화가 마초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의 영화는 상처 받은 짐승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항상 여성의 자궁으로 귀환하려는 자궁회귀의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장진에게는 죽음이 어머니의 자궁이다. 세상에 나와 상처 받은 그는, 사형을 기다리는 것보다 자기 손으로 죽음을 향해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려고 한다. 죽음이야말로 생명이 새로 태어나고 다시 돌아가는 거대한 자궁의 문이 아니겠는가?
출처 : 하재봉의 영화사냥
글쓴이 : 다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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