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이문숙]
이석주
슬리퍼[이문숙]
지압 슬리퍼를 팔러 온 남자를 보고 생각났다
작년에 신다 책상 아래 팽개쳐 뒀던 슬리퍼
먼지를 폭삭 뒤집어쓰고 까마득 버려져서도 슬리퍼는
여전히 슬리퍼다
기억이란 다 그런 것이다
기억 속에는 맨홀 뚜껑 같은 확실한 장치가 없어서
그 아래 무언가를 고치러 들어간 사람을 두고도
꽉 뚜껑을 닫아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 남자가 질식하건 말건
그러다 숨을 놓기 직전
고철 덩어리 같은 기억을 붙들고서야
아차, 뚜껑을 열어보는 것이다
어쨌든 물건이라는 건 마지막이라는 게 없어서
먼지만 활활 털어버리면 또 슬리퍼가 된다
망각의 먼 땅을 털벅거리며 돌아다니고서도
금방 뒤축이 닳아빠진 슬리퍼로 돌아온다
작년 이맘때 어디서 무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발을 충실히 꿰차고
슬리퍼는 또 열심히 끌려다닐 것이다 저러다가도
슬리퍼는 또 책상 아래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처박힌다
기억이 그렇게 시킨다면
케케한 먼지와 어둠을 거느리고
누군가 슬리퍼를 사납게 끌며 또 어두운
복도 저쪽으로 사라진다
* 한 십오년전쯤 중국에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심양, 하얼빈,북경,상하이,장가항을 돌아다녔는데
조용한 장가항 오성호텔에서 묵을 때의 기억이 난다.
객실내에서는 종이로 만든 슬리퍼를 신게 되어있었는데 신자마자 불량 슬리퍼는 찢어져버렸다.
카운터에 전화를 걸어 플리즈 기브미 페이퍼슬리퍼,라고 소리쳤다.
카운터에 있는 넘은 페이퍼?페이퍼? 하며 깐죽대듯 대꾸를 한다.
페이퍼슬리퍼를 못알아듣나 해서 페이퍼샌들,이라고 소리쳤다.
그래도 페이퍼?페이퍼? 하며 깐죽댄다.
페이퍼샌들도 모르나 해서 페이퍼슈즈라고도 소리쳤다.
끝내 그 넘은 페이퍼만 외쳐대고 나는 씩씩거리고 결국은
'야 이 XX야, 슬리퍼 몰라? 샌들 몰라? 슈즈 몰라?'
머리를 감지않아 냄새나는 그 넘은 한참을 지나서야 객실에 와서 확인하고 종이 슬리퍼를 가져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