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이기철]

JOOFEM 2010. 10. 8. 12:49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 벚꽃 그늘에 앉아있으면 눈도 부시고 희망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벅찰 테지만

지금은 계절적으로 가을이니 벚꽃 그늘 대신 색바랜 나뭇잎 아래에서

높아진, 그래서 아득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 또한 아득하며

선선해진 바람 탓에 가슴이 서늘하고 시리기도 할 터이다.

무언가의 그늘이 있다는 건 마음에 안온함과 함께 날개 달린 자유함을 갖게 한다.

가을이다.

가을이 주는 긴 자락의 햇살과 속깊이 따스한 기운과 어디든 눈길을 줄 수 있는 마음의 방랑길이 있으니

지금, 여기서 계절이 주는 아름다움을 만끽할 일이다.

벚꽃 대신 구절초를 보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