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불멸의 명작[천양희]
JOOFEM
2012. 4. 21. 17:34
불멸의 명작[천양희]
누가
바다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바닥부터 말하겠네
바닥 치고 올라간 물길 수직으로 치솟을 때
모래밭에 모로 누워
하늘에 밑줄친 수평선을 보겠네
수평선을 보다
재미도 의미도 없이 산 사람 하나
소리쳐 부르겠네
부르다 지치면 나는
물결처럼 기우뚱하겠네
누가 또
바다에 대해 다시 말하려면
나는 대책없이
파도는 내 전율이라고 쓰고 말겠네
누구도 받아쓸 수 없는 대하소설 같은 것
정말로 나는
저 활짝 펼친 눈부신 책에
견줄 만한 걸작을 본 적 없노라고 쓰고야 말겠네
왔다갔다 하는 게 인생이라고
물살은 거품 물고 철썩이겠지만
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건 바다뿐이라고
해안선은 슬며시 일러주겠지만
마침내 나는
밀려오는 감동에 빠지고 말겠네
* 사는 것 만큼 불멸의 명작이 또 있을까.
한 사람의 일생은 그것 자체가 잘 쓰여진 소설이다.
지상에 와서 비록 몇명의 사랑만 주고 받았다 해도
그것만으로도 기적이고 감동이다.
집을 왔다갔다 하고
학교를 왔다갔다 하고
일터를 왔다갔다 하는 사이
주연도 나이를 먹고
조연들도 나이를 먹고
그렇게 파도처럼 철썩였지만
마지막 장에서는 전편의 마지막 장면이 없다는 표시를 남기며
"not continued"라고 쓰고
바닥이 더이상 없는 곳으로 가버린다.
봄비가 내리며 늦게 핀 꽃들이 일순간 지는 사이
짧은 불멸의 명작이 책을 덮고야 만다.
등산복 입고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또 하나의 명작을 펼쳐드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