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빙수 먹는 저녁 [고두현]
팥빙수 먹는 저녁 [고두현]
흰 눈가루처럼 백설기처럼
부드러운 얼음이 소복하게 쌓이는 밤
둥근 유리그릇 안에서 그대는
뽀얀 우유와 연한 오렌지 조각 어루만지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풀고
팥고물처럼 우리 이렇게 달디단 눈빛으로
한 백 년쯤 녹아갈 수 있다면
오늘같이 더운 날
이마에 맺힌 땀방울 송글송글 닦아주며
달뜬 마음도 식혀주며
한술한술 서로 입에 넣어주다가
빈 그릇 밑바닥에 얼굴 비춰보면서
시원하지 참 시원하지 다독여주면서
한 그릇 더 시킬까 마음 써주면서
오순도순 손잡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 사각사각 눈 내리는 겨울밤까지
이 길 오래오래 이어지길 빌면서
내일 또 내일 내년 후 내년
이 시려 찬 것 더 못 먹는 날까지
손가락 걸고 자박자박
아름답게 늙어갔으면.
* 학군후보생 때 여름이면 병영훈련을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에 꼭 팥빙수집에 달려가 한그릇 뚝딱 비우고 들어갔다.
왠지 퇴소하면 팥빙수가 다 팔릴지도 몰라서였던 것 같다.
아뭏든 덥고 힘든 훈련중에 팥빙수가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면 뻥이 좀 심하다고 할라나.
결혼하고 직장동료를 집으로 초대하니 동료들이 뭘 사다줄까 물었다.
그당시에는 빙수기가 드문 때라 일제 빙수기를 사달라고 했다.
곰모양의 빙수기는 얼음을 갈면 눈이 구루구루 좌우로 돌아갔다.
어딘가 처박혀있을 빙수기이지만 가끔 팥빙수를 만들어 먹었었다.
요즘같이 팥빙수 한그릇에 만이천원 내지는 팔,구천원할 때에는 집에서 만들어 먹어도 좋을 테다.
팥빙수 원가가 삼천원도 안된다는데 너무 많이 남겨먹는 나쁜 가게들.
당분간 싸질 때까지는 팥빙수를 먹지말아야겠다.(과연 그럴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