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전류 [이병률]
흰꽃은 사진에 잘 안찍힌다. 신비주의?
슬픈 전류 [이병률]
흰색이라 합시다
동네에 마을에 흰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고 합시다
최초의 나무 한 그루가 우리 손발짓과
가리키는 곳을 관장한다고 합시다
손끝을 모은 한가로운 모든 것들을 흰색으로 칩시다
등대를 갖고 싶어하는 나와
번번이 망치로 머리를 맞는 기분이 드는 당신
모두 흰색에 가담되어 있다고 하자구요
삼켜도 미어지는 가슴뼈와
생을 세 번 거친 것과
후생을 한 번 다녀온 것
이 다행인 것 모두를 흰색이라 합시다
마음을 정돈시킨 사람들의 내력을
죽을 만큼 혼자인 것과
그리하여 둘을 만들고 마는 난장을
밥을 욱여넣는 것처럼 사랑할 때나
생각의 절반을 갈아치우게 하는 달력의 일들
모두가 흰색이었다 합시다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광장에 칼이 지나가는 것
흐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흐르는 것
그 방향으로 모질게 허리가 굽는 것
흰색입니다
* 흐르는 강물, 흐르는 세월, 흐르는 전류, (한쪽으로) 흐르는 힘,
빛을 사랑하는 굴광성 식물의 굽어 흐르는 어쩔 수 없음(알 수 없는 그 힘).......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어어어, 하는 사이
죽음을 맞고 부서지고 망가지고 잊혀지고 사라지고
어어어, 하는 사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가 그냥 하얀 색이 되는 건 아닐까.
혹시 영혼들이 모여 사는 그곳은 일곱 색깔이 없고 흰색만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이름표도 없고 형체도 없고 크기도 없어서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되고 그냥 흐르는 그 무엇이 되어 욕망도 없고 사랑도 없는 건 아닐까.
여기 모여 사는 인간들은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주체 못하고 슬픈데
막을 필요가 없는 그곳은 슬픔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바람이 제법 불면서 색을 가지고 있던 나뭇잎들이 우수수, 삼천궁녀가 되고 있다.
흐르는 바람을 어쩌지 못해 떨어지고 나서야 분하다는 듯 바닥을 긁고 있다.
어어어, 하는 사이 가을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