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권혁웅]
살짝 얼음이 언 김장김치 국물에 김치 송송 썰고 양념 조금 더 넣은 국수는 어디 가면 먹을 수 있을까.
이북식 김치말이,란 간판만 보면 혹시, 하고 가보지만 어머니의 맛은 잘 없다.
국수 [권혁웅]
넓은 마당 옆에 국수집이 있다고 내가 말했던가 우리 이모네 집이다 저녁이면 어머니는 나를 그리로 마실 보내곤 했다
우리는 국수보다 삼양라면이 좋았는데 이를테면 꼬불꼬불한 면발을 다 먹고 나서야 아버지는 상을 엎었던 것인데
국수 뽑는 기계는 쉴새없이 국수를 뽑았다 동어반복을 거기서 배웠다 목포는 항구고 흥남은 부두지만
국수는 국수다 국물을 우려내는 멸치처럼 나는 작았고 말랐고 부어 있었다 나는 저녁마다 국물 속을 헤엄쳐 다녔다
어느 날 아버지가 고춧가루를 뿌렸다 좋아요 형님, 다 신 안 와요 보증을 잘못 섰다고 한다 거길 떠난 후에
내가 먹은 국수는 어머니가 반죽해서 식칼로 썰어낸 손칼국수다 면발이 빼뚤빼뚤해서 이모네 국수처럼 가지런하지 않았다 내가
보증한다
그때 내가 좋아한 건 이틀에 한 번씩 오는 번데기 리어카와 솜틀집 문에 치여 죽은 병아리 그리고 전도관의 풍금소리,
결단코 국수는 아니었는데
그 후로도 눈이 내렸다 밀린 연탄재를 한 길에 내다버릴 수 있다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그 눈, 국수가 나올 때
그 위에 뿌리는 밀가루처럼 하얗고 퍽퍽한 그 눈, 우리는 면발처럼 줄줄이 넓은 마당에 나오곤 했던 것인데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진하게 우려낸 하늘은 무엇인가 번데기처럼 구수하고 병아리처럼 노랗고 풍금의 건반처럼 가지런한
이것은 무엇인가
* 어릴 때 입맛은 사실 변하지 않고 평생 간다.
혀에서 느끼던 그 맛은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맛을 내주던 어머니는 세상에 안 계시니
그 맛을 다시 보기란 어렵다.
어릴 땐 수제비, 칼국수, 김치말이국수등을 참 많이도 먹었다.
요즘도 가끔은 수제비를 먹으러 다니지만 그 맛을 찾기 어렵다.
김치말이국수는 좀 특이해서 겨울날 땅에 묻은 김장김치 국물로 만드는 거라
김치냉장고의 김치로는 그 맛을 낼 수가 없다.
'번데기처럼 구수한' 그 맛도 기가 막히고
냉면 국물에 풀어헤쳐진 계란 노른자의 구수한 그 맛도 일품이었다.
소박한 그 맛을 오감으로 저장해둔 탓에 평생 그리움이 동어반복을 하는 것이다.
권혁웅시인은 주페가 자란 곳과 아주 근접한 동네이어서
저장물들이 많이 흡사하다.
풍경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다. 그래서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