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나에서 블랙커피를 [배옥주]
사바나에서 블랙커피를 [배옥주]
카페 사바나에 앉아
가젤의 눈빛을 읽는다 수사자가 되어
툭툭 바람의 발자국을 털어낸다
바위비단뱀의 혓바닥 같은
찻잔 위로 검은 유목민들이 떠다니고
소용돌이로 끓어오르는 암갈색 눈알들
야자나무 그늘이 내려오는 창가로
말굽 먼지를 일으키며 지평선이 달려온다
성인식을 치른 힘바족 처녀들이
내 두 개의 덧니 사이로 걸어나오고
유두 같은,
검은 향기를 혀끝으로 음미한다
폭풍우 지나간 손바닥 위에
블루마운틴 한 잔을 올려놓으면
대륙의 어디쯤에서 깃털의 영혼이 나부끼고
아라비카 전생의 내가 보인다 하얀 손바닥과
희디흰 눈자위를 가진 처녀가
유르트 같은 찻잔 속에서 어른거린다
이제 막 흑해의 붉은 달이 떠올랐다
* 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공항에 사바나,라는 카페가 있었다.
출장갈 일이 있어 비행기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서 어슬렁거리다
공항에서 일하는 여자에게 전화를 했다.
나보다는 대여섯 어린 여자인데 열한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혼자 사는 여자였다.
전화기 속으로 엄청 반갑게 전화를 받으며 몇층에 가면 카페가 있다고 했다.
가서 기다리면서 보니 사바나,라는 카페였다.
십여분이나 기다렸을까 여자가 왔다.
들고온 여행용 가방에는 먹을 것부터 이것저것 필요하다 싶은 것을 넣어두었는데
출국할 때 가져 가란다.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데 남자 하나가 왔다.
역시나 공항에서 일하는 남자인데 친구라고 한다.
속으로는 이 남자를 왜 내게 소개하는 걸까 궁금했다.
출국해서는 가방속의 먹거리가 꽤 요긴하게 쓰였다.
특히 독일에서 맥주를 마실 때는 김이 술안주로 딱이었다.
이 가방은 지금도 가끔 쓰고 있다.
몇달 뒤 여자는 그 남자와 결혼했고
결혼식에 가서 축의금을 내고 축하해 주었다.
꽤나 행복해 하고 싶었던 여자였으니 잘 살길 바란다.
잊고 살았는데 시 제목이 오래 전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게 해준다.
올 가을에 독일에 또 출장을 가게 되면 사바나 카페를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