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당신은 가난뱅이, 당신은 불쌍한 자 [릴케 / 김재혁 역]

JOOFEM 2015. 7. 26. 09:27

 

 

 

 

 

 

당신은 가난뱅이, 당신은 불쌍한 자 [릴케 / 김재혁 역]

 

 

 

 

 

당신은 가난뱅이, 당신은 불쌍한 자,

당신은 놓일 곳 없는 돌멩이,

당신은 딸랑이를 흔들며 성 밖을 헤매는

내쫓긴 문둥이입니다.

 

바람이 그렇듯 당신의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까닭입니다.

명성도 당신의 헐벗음을 가려줄 수는 없습니다.

집 없는 아이의 누더기 옷이 차라리

더 멋지고 소유에 가까울 것입니다.

 

어떻게든 숨기려고 제 허리를 마구 졸라매어

첫 임신의 첫 숨결을 질식케 하는 처녀의

배 안에 있는 태아의 기운 만큼이나

당신은 가련합니다.

 

당신은 도회의 지붕 위로 복 되게 쏟아지는

봄비만큼이나 가련합니다.

세상에서 멀어져 영원히 독방에 갇힌

죄수들이 가만히 품어 보는 소망과 같습니다.

돌아누우며 행복을 느끼는 환자, 여행의 황량한 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철로 길의 꽃처럼 슬프도록 가련합니다.

얼굴을 파묻고 우는 그 손처럼 그토록 가련합니다.

 

추위에 떠는 새인들 당신과 같을까요,

하루 종일 굶주린 개인들 그럴까요,

사로잡은 뒤로 거들떠보지도 않는

짐승들의 오랜 말없는 슬픔,

그 자기 상실, 이 모두 당신에 비길 수 있을까요?

 

그리고 부랑인 숙소의 가난한 사람들, 이들은

당신과 당신의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맷돌도 못되는 조그만 돌이지만

약간의 빵은 갈고 있으니까요.

 

당신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

얼굴을 가린 거지입니다.

당신은 가난의 위대한 장미,

햇살에 빛나는

황금의 영원한 변용입니다.

 

이 세상에 다시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는

당신은 조용한 방랑자,

어디에 쓰기에도 너무 크고 너무 무거운...

당신은 폭풍 속에서 울부짖습니다. 한번 켜보려는 사람마다

켜다가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 하프 같습니다, 당신은.

 

 

 

 

 

 

 

 

* 윌리암 서머셋 모옴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 나오는 주인공 필립이 떠오르고

필립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푼 샐리가 떠오른다.

마음이 가난하고 불쌍한 한 남자에게 사랑을 베풀다니 천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젊은 날의 나는 이상형으로 꼽은 사람이 있었으니

맑고 깨끗한 목소리로 노래한 양희은, 지극하면서도 즐거움을 주는 '부생육기'의 운이,

그리고 '인간의 굴레'에 잠깐 등장하는 샐리였었다.

육신이 가난한 것보다는 영혼이 가난한 자가 더 불쌍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자는 천사와 같다.

그렇지 못한 자는 가난뱅이요, 불쌍한 자이다.

 

며칠전 오랫동안 알고지내는 중소기업 사장이 찾아왔다.

'요즘도 방글라데시의 아이들을 돌보고 계세요?'

불쑥 물어온 질문에 참 많이 당황했다.

한동안 유니세프를 통해 먼 나라의 아이들을 사랑한 적이 있다.

88년생의 첫번째 아이는 우리 큰애와 동갑이기도 해서

대학까지도 보내줄까, 했는데 일년인가 이년마다 아이들을 바꾸는 것이었다.

정들지 말라는 뜻 같긴 하지만 너무나 일방적으로 바꾸고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몇년인가 후에 돕는 일을 그만 두었다.

돌보고 계세요? 라는 질문에 가난뱅이는 바로 나였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아이들도, 치매노인들도, 그 어떤 가난한 자를 돌아보지 않는 진짜 가난뱅이가

바로 나였다는 것!

 

늘은 가난뱅이였음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날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