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흰 꽃 만지는 시간 [이기철]

JOOFEM 2017. 7. 13. 16:49








흰 꽃 만지는 시간 [이기철]


                                                    아무도 없다고 말하지 마라

                                                              하얗게 씻은 얼굴로 꽃이 왔는데




흰 꽃은 뜰에 온 나무의 첫마디 인사다

그런 날은 사람과의 약속은 꽃 진 뒤로 미루자

누굴 만나고 싶은 나무가 더 많은 꽃을 피운다

창고에서 새어 나오며 공기들은 가까스로 맑아지고

유쾌해진 기체들은 가슴을 활짝 열고 꽃밭을 산책한다

햇살의 재촉에 바빠진 화신은 좋아하는 사람께로 백리에 닿는다

눈빛 맑은 사람 만나면 그것만으로 한 해를 견딜 수 있다

흰 꽃 만지는 시간은 영혼을 햇볕에 말리는 시간

찬물에 기저귀를 빨아 대야에 담는 사람의 흰 손이 저랬다

아름다운 사람이 앉았다 간 자리마다

다녀간 꽃들의 우편번호가 남아 있다

풀잎으로 서른 번째 얼굴을 닦는다

내일모레 언젠가는 그들이 남긴 주소로

손등이 발갛도록 흰 잉크의 편지를 쓰자







* 사실 무채색 꽃을 사람들은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

빨강꽃, 노랑꽃, 보라색꽃 등등 저마다 날 봐주세요! 하며

요란하고 현란한 색으로 핀 꽃들이 뽐내듯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하얀 와이셔츠를 하얗게 빨고 더 하얗게 다림질을 하고나면

브링브링 얼마나 순백의 아름다움이던가.

흰 손의 마음이 그러하니 꽃 또한 그러하다.

흰 꽃을 만지는 시간이 영혼을 헹구는 시간이다.

기도하는 순간 같지 않은가.


베란다에는 팔년 키운 커피나무가 흰 꽃을 피우고 지금은 대부분 지고

꽃이 진 자리에 커피콩알이 자라고 있다.

오렌지 자스민도 며칠 흰 꽃의 향기를 뿜어내더니 지는 중이다.

오월에 작은 병에 따놓았던 쥐똥나무꽃도 흰 꽃이었는데 예쁘게 말라버렸다.

마르고 나면 더이상 무채색은 아니다. 약간 갈색으로 변한다.

그럼에도 진한 향기는 그대로다.

향기와 열매가 미래를 꿈꾸게 하는 우편번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