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나는 기쁘다 [천양희]

JOOFEM 2017. 7. 18. 11:32


                                                          Gustav Adolph Hennig, 독서하는 소녀







나는 기쁘다 [천양희]






바람결에 잎새들이 물결 일으킬 때

바닥이 안 보이는 곳에서 신비와 깊이를 느꼈을 때

혼자 식물처럼 잃어버린 것과 함께 있을 때

사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을 때

욕심을 적게 해서 마음을 기를 때

슬픔을 침묵으로 표현할 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자유로울 때

어려운 문제의 답이 눈에 들어올 때

무언가 잊음으로써 단념이 완성될 때

벽보다 문이 좋아질 때

평범한 일상 속에 진실이 있을 때

하늘이 멀리 있다고 잊지 않을 때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누울 때

나는 기쁘고


막차를 기다리듯 시 한 편 기다릴 때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일 때

나는 기쁘다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 2017)





*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와닿는 시를 발견하고

값없이 읽을 때가 가장 기쁘다.

시를 쓰는 이는 얼마나 많은 산통을 겪었으며

시는 얼마나 크낙한 압출진통을 겪고 세상에 나왔을까.

값없이 읽어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