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가슴 공원 [이기철]

JOOFEM 2018. 3. 23. 12:50








가슴 공원 [이기철]






  어느 빛 밝은 오후 나는 신생 독립국 같이 조그만 공원

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이 왕국의 초대 왕이나처럼 지

나는 구름과 스치는 바람 드리운 하늘빛을 모아 수구회의

(首口會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무와 꽃들은 일제히 문무

백관처럼 화관을 쓰고 사슴과 노루와 캥거루들은 신하처

럼 공손한 오후였습니다 신생국은 아직 이름이 없어 나는

백과전서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찾아 공화국 이름을

지어야 했습니다 나무는 나무 이름을 사슴은 사슴이름을

청원해 왔습니다

  꽃은 수줍은 웃음을 머금고 수렴청정을 거들고 노루는

침묵 캥거루는 제 보듬은 아기에만 열중했습니다 회의가

길어지면 신생국이 고대국이 됩니다 나는 한 이름 앞에 비

점(批點)을 찍고 독립국 이름을 제정했습니다 내가 만든 헌

장앞에 나는 가슴 공원이라 주서하고 왕의 목청이나처럼

둥글게 그 이름을 선포했습니다 가슴 공원은 나와 이 시를

읽은 당신의 가슴 속에 한 제국의 공원으로 개원(開園)될

것입니다



                                - 흰 꽃 만지는 시간, 민음사, 2017






* 꽃 공원으로 가장 먼저 축포를 터뜨리는 곳이 청매실농원이다.

사람 많은 곳은 거의 가지 않는 나로서는 단풍놀이도 안 가지만

매화축제나 벚꽃축제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 평생 한번은 가야되지 않나, 하는 마음 속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청매실농원을 다녀왔다.

이번 주가 사실은 절정인데 지난 주에 다녀왔다.

지도상으로는 주차장이 있길래 주차가 가능하겠다 싶었지만

코딱지만한 주차장만 있고 도로가에 세우지 않으면 농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삼키로를 코앞에 두고 두시간 넘게 걸려서 도착한 농원에는 차 댈곳이 없어

결국은 누군가 빠지는 그 자리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서

인파인지 꽃파인지에 휩쓸려 흰꽃을 만지고 흰꽃을 찍으며 구경하려는 찰라에

핸드폰이 울렸다.

도로가에 세운 차는 행정처분 받습니다. 빼 주세요.

김 빠지는 소리다.

벚굴전 한 조각에 맥주 한 잔 들이키고 차를 빼고는 화엄사쪽으로 이동했다.

아쉬웠던 건 농원 기슭에서 화관을 팔았는데 참 예쁜 화관이었다.

적어도 기념으로 그것 하나는 샀어야 했는데.

화엄사에서 산수유꽃과 사찰음식으로 대신한 꽃놀이였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