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갈 수 없는 곳과 엉겨붙다 [안정옥]

JOOFEM 2018. 6. 15. 09:01








갈 수 없는 곳과 엉겨붙다 [안정옥]




 


늦은 밤 사거리에선 매번, 거의, 빨간 신호등에 걸렸다

멈춰 있을 동안 이 생각에 들렸고 저 생각에 들렸다

왼쪽으로 버드나무 하나 마음 없이 흐늘거린다

그 사이로 걸어다닐 수 있는 길이 내려다보인다

다리 난간의 흐릿한 불빛들이 강물 위로 쏟아져

무수한 별들과 엉겨붙어 있었다 엉겨붙음을 보다가

걸어갈 수 있는 길로 급히 걸어가보기로 한다

채 다리 아래 별빛이 도달하기도 전에 출발이다

며칠 지나 다시 그 자리에 멈췄을 때 꼭 거기까지다

내가 갈 수 있는 곳 접근하려는 내 마음과

강력히 막으려는 신호등의 지시

가장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빛

도발과 금지도 포함되어 있건만 그 빛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얼마나 손대고 싶어했던가

 

어느 나무에게는 다른 나무의 가지를 잘라 눈접을 붙여

하나로 엉겨붙게도 만든다 그들이 왜 그래야 되는지를

나는 모르겠다 빨간 불빛에 잡혀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알맞은 이 비유,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

 

집에 들어서면 나무의 가지들이 하나로 엉겨붙어 있는,

내가 힘들게 접목한 수많은 현상들과 일일이 대꾸하고

흘깃거리며 소파에 앉는다 수십 가구점을 돌다 나의 눈에

엉겨붙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내 손에 엉겨붙은

리모컨을 누른다 다시 엉겨붙을 세상을 찾아 기웃거린다

이제 지친 몸을 누이면 온갖 것들이 잠들기 전까지

나와 엉겨붙으려 왔다가 가고 다시 왔다 돌아간다

그러다 깊은 어둠이 솜이불처럼 나를 덮어준다

몇 번이나 뒤척이는 나에게 걱정은 그만하라고

한번 더 달빛과 엉겨붙게 해준다 이제 무언가

못마땅함을 가진 나무에게 다른 나무의 가지를 붙여

조금 더 씩씩한 나무를 만들려는


                    -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 문학동네, 2017










* 직장생활 33년중 29년을 함께 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걱정을 걱정인형에게 맡기기엔 아직 은퇴할 나이가 아니어서

몇 번씩이나 뒤척이곤 했는데 곧 직장을 다시 구해야 한다.

구하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조금 더 씩씩한 나무가 되라는 神의 뜻이 어딘가에 엉겨붙게 해줄 것이다.

내일은 남아있는 직원들과 작별한다.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

좋은 일, 혹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