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절편 예찬 [장석주]
JOOFEM
2019. 1. 29. 13:24
절편 예찬 [장석주]
떡집에서 절편을 사 갖고 돌아와
이 하얀 것을 욕심 없이 베어 물 때
울컥 올라오는 슬픔의 시작이 어디인지
우리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절편은 탱탱하고 아득하며 무미한 것,
절편에는 약육강식의 피비린내가 없고
물의 느림과 식물의 고요한 집중뿐!
절편에는 주검의 곡절이 배제되고
곡식 낟알을 키운 흙의 비애만 있을 뿐!
절편의 혈통은 달의 사촌,
절편을 먹는 민족은 평화주의자일 것이다.
절편을 먹으며 농본주의의 대의를 곱씹고
우리는 비바람 소리에 귀기울인다.
모란과 작약꽃이 피는 봄날을 견디며
절편이 없는 떡집은 떡집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절편과 함께 중국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절편을 사이좋게 나누며
거대한 들의 평평함과 트임을 삼킨다.
가을 저녁과 초록별의 소슬함을 들이켜며
우리는 작별 인사를 하루 더 늦추고
좋았던 옛 미래로 돌아가자 말할 것이다.
-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문학동네, 2019
*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졸업한 세대는
대개 고등학교 때 행사가 있거나 생일이 있거나 무슨 날일 때
절편을 나누어 먹었었다.
요즘은 피자로 나누거나 햄버거를 나누지만
그때는 절편을 공평하게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두툼하면서도 쫄깃하고 기름기 자르르 흐르던 절편은
탱탱하고 아득하고 무미한 것이라도
사이좋게 지냈던 그 옛날을 떠올리게 한다.
요즘 절편을 사먹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가끔 경조사 식탁에서 희귀하게 만나게 된다.
미래에도 사이좋게 나누는 절편이 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