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홀수의 방 [박서영]

JOOFEM 2019. 3. 1. 11:13






홀수의 방 [박서영]

 

   

 

 

 

  잊겠다는 말 너머는 환하다. 그 말은 화물열차를 타고 왔고 꽃나무도 한 그루 따라왔다. 꿈이었나봐. 흩어지는 기억들. 슬픈 단어들은 흩어진 방을 가진다. 너는. 나를. 그녀를. 누군가를. 사랑은 없고 사랑의 소재만 남은 방에서 너는 긴 팔을 뻗어 현관문에 걸린 전단지를 만진다. 잊겠다는 말은 벼랑 끝에 매달린 손. 이미 그곳에 있었지만 도대체 그곳은 어디인가. 떠나면서 허공에 던져놓은 너의 단어들. 흩어져 있는 너의 단어들이 흰 배를 드러내놓고 날아가는 걸 본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등을 돌렸다. 이제 내 몸에서 돋아나는 그림자를 이해하기 위해 계절의 밤을 다 소비해야 한다. 우리의 그림자는 한 패가 아니다. 그림자는 암호처럼 커진다. 씻어도 투명해지지 않는다. 젖어서 흐물흐물 찢어지면 내부를 들여다볼 텐데. 이젠 버려야 하나. 어차피 한 패도 아닌데. 우리는 오로지 나였을 한 사람과, 너였을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붙어있다. 인정하자. 그러지 않으면 사랑에 빠져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으니. 가로등 불빛 아래 쭈그리고 앉아 그림자의 윤곽을 돌멩이로 그려준다. 내가 떠나도 바닥에 남을 뭔가를. 기억은 순간순간 그림자들의 방을 뺏는 놀이 같아.

  그 와중에 잊고 싶다는 말이 개미처럼 우왕좌왕한다. 그 와중에 미안과 무안(無顔)은 깊은 방을 만들고 있다. 나는 방을 잃고 현관문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너의 손목을 붙잡고 있다. 오로지 너였을 한 사람을 발굴하듯이. 그래서 발굴된 영혼이 다른 영혼을 찌를 듯이 기억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


                                   -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문학동네, 2019









* 이것은 누군가의 최후의 모습일 수 있다!

박서영시인의 '방문'의 첫 귀절이다.

최후의 모습을 미리 경험하게 해주는 시 한 편.

사랑하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지는 않는다.

다만 살아야 하기에 바쁜 일상을 살 뿐이다.

하지만 기억은 끈질겨서 완전히 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혼자의 방에서 문고리 삼인방인지 백인방인지 모르지만

드나드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외로운 나의 마음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아마도 그만큼 외롭고 무섭고 잊혀질까 두려운 까닭일 게다.

시집의 제목을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잊지 말라고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라고 지은 것 같다.


첫, 한 편을 읽으며 잊지 않으리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