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슬픔이라는 빌미 [민왕기]

JOOFEM 2019. 4. 30. 17:27







슬픔이라는 빌미 [민왕기]





빌미라는 낱말이 낯설어서 밤에 사전을 폈다


무엇의 꼬리 같은 이 말을 탐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다가, 근원 없이 어지러운 우리말이라는 걸

말의 촉각이 닿을 수 없는 오래된 말이라는 걸 알고는


알 듯 모를 듯 모든 말의 꼬리에 실을 매달아 보내고 싶었다


빌미라니, 한 생의꼬리를 감추고 숨어버린 신의 머리카락쯤 되려나


겨누고 싶지만 빗나가는 말의 화살이 있다면, 저 빌미쯤 되겠지만


당신 없는 오후에 사전을 뒤적인 것은 빌미라는 말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한 슬픔이 또 한바탕 오려던 찰라, 이 슬픔의 빌미가 된 것은 무엇인지


발꿈치를 들고 숨어버린, 세상의 어느 조용한 시간에게

잠시 따져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 달아실출판사, 2019








* 빌미라는 말은 나에게 빈틈이 있다는 걸 말하는 것일 테다.

나이를 먹으면 때가 되어 밀려나는 게 숙명이다.

육학년을 코앞에 두고 점점 밀려나는 빌미를 주게 된다.

그래서 올 일월에는 법정관리인 자격증을 따고

올 이월에는 그 어렵다는 가스일반시설안전관리자 자격증을 땄다.

어릴 때처럼 총명하지 않지만 간신히(?) 시험에는 합격했다.

명문대를 나와 아파트 경비하는 친구가 있다.

중령으로 예편해서 회사 경비를 하는 후배도 있다.

의외였지만 빈틈을 준 것이고 빌미를 준 것이다.

나는 아직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이것도 오래 갈지는 모르겠다.

밀려나는 빌미가 생기면 아무 자격증으로라도 어디선가 일을 해야할 게다.

그 쯩이 나의 바다가 되어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