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조그만 발 - 영희 누나 [오탁번]

JOOFEM 2019. 6. 25. 13:05








조그만 발 - 영희 누나 [오탁번]







몇 년 전 가을

영희 누나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깜작 놀라 춘천으로 달려갔다

당뇨와 고혈압에 치매까지 걸린

영희 누나는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 탁번이 왔니?

허지만 금세 말을 바꿨다

- 누구신가?

나는 눈물을 훔치고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그 옛날 곱던 얼굴 간데없고

내 까까머리 쓰다듬어주던

어여쁜 손은

쪼글쪼글 마른 수세미와 같았다


다음 해 봄

영희 누나가 정말 위독하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또 춘천으로 달려갔다

간병사가 매일 오고

며느리들이 번갈아 보살피고 있었지만

링거 주사 주렁주렁 달린 영희 누나는

그냥 숨만 붙어 있을 뿐

사람 하나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누나 빨리 데려가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었지만

춘천에서 전화는 좀체 오지 않다가

지난 봄 어느 날

춘천에서 급한 소식이 왔다

나는 단숨에 달려갔다

하느님은 낮잠을 주무시는지

영희 누나는

눈도 못 뜬 채 나비 숨을 쉬면서

가녀린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미줄보다 더 가는

생명의 끈이 왜 이리 지지한가

나는 눈물을 머금고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가을이 왔다

영희 누나가 세상 떠났다는 메시지가

마침내 왔다

부리나케 달려간 성심병원 영안실

천연색 영정 속에서

그 옛날의 영희 누나가 나를 불렀다

- 탁번이 왔니?

시간이 딱 멈춘 텅빈 공간

향내음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올랐다

입관할 때

누나의 조그만 발을 쓰다듬으며

열 살 아이처럼 나는 울었다

아아

영희 누나


                   - 알요강, 현대시학사, 2019









* 오탁번시인의 시에 등장했던 영희 누나.

그 영희 누나가 마침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이 시집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

실은 선생님인데 누나가 된 영희 누나.

이제 오탁번 시인의 시에 다시 등장할지 알 수 없다.

나에게도 누나같은 선생님이 있었어서 시에 등장하는 영희 누나가 정감이 갔었다.

초록색 아주 두꺼운 시집을 펼치면 영희 누나를 만나겠지만

새로 나오는 시집에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뭏든 알요강이라는 새 시집을 내신 오탁번선생님께 감축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