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발 - 영희 누나 [오탁번]
조그만 발 - 영희 누나 [오탁번]
몇 년 전 가을
영희 누나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깜작 놀라 춘천으로 달려갔다
당뇨와 고혈압에 치매까지 걸린
영희 누나는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 탁번이 왔니?
허지만 금세 말을 바꿨다
- 누구신가?
나는 눈물을 훔치고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그 옛날 곱던 얼굴 간데없고
내 까까머리 쓰다듬어주던
어여쁜 손은
쪼글쪼글 마른 수세미와 같았다
다음 해 봄
영희 누나가 정말 위독하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또 춘천으로 달려갔다
간병사가 매일 오고
며느리들이 번갈아 보살피고 있었지만
링거 주사 주렁주렁 달린 영희 누나는
그냥 숨만 붙어 있을 뿐
사람 하나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누나 빨리 데려가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었지만
춘천에서 전화는 좀체 오지 않다가
지난 봄 어느 날
춘천에서 급한 소식이 왔다
나는 단숨에 달려갔다
하느님은 낮잠을 주무시는지
영희 누나는
눈도 못 뜬 채 나비 숨을 쉬면서
가녀린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미줄보다 더 가는
생명의 끈이 왜 이리 지지한가
나는 눈물을 머금고
봉투 하나 놓고 나왔다
가을이 왔다
영희 누나가 세상 떠났다는 메시지가
마침내 왔다
부리나케 달려간 성심병원 영안실
천연색 영정 속에서
그 옛날의 영희 누나가 나를 불렀다
- 탁번이 왔니?
시간이 딱 멈춘 텅빈 공간
향내음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올랐다
입관할 때
누나의 조그만 발을 쓰다듬으며
열 살 아이처럼 나는 울었다
아아
영희 누나
- 알요강, 현대시학사, 2019
* 오탁번시인의 시에 등장했던 영희 누나.
그 영희 누나가 마침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이 시집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
실은 선생님인데 누나가 된 영희 누나.
이제 오탁번 시인의 시에 다시 등장할지 알 수 없다.
나에게도 누나같은 선생님이 있었어서 시에 등장하는 영희 누나가 정감이 갔었다.
초록색 아주 두꺼운 시집을 펼치면 영희 누나를 만나겠지만
새로 나오는 시집에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뭏든 알요강이라는 새 시집을 내신 오탁번선생님께 감축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