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이은규]

JOOFEM 2019. 11. 25. 13:51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이은규]

 

 

 

 

 

이토록 눈부신 날

나의 세탁소에 놀러오세요

무엇이든 표백이 가능합니다

너무 투명하여, 그림자조차 없는 문장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번째 봄이다*

라는 당신의 문장에 기대어 한 절기

환절기 잘 견뎠습니다

 

네, 문장 덕분입니다

아무렴요 아무렴요

 

고집이라고 쓰고

표백된 슬픔이라고 읽습니다

표백된 슬픔이라고 쓰고

고집이라 읽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겨울

어떤 문장에 기대어 동절기

한 절기를 견뎌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문장 때문입니다, 네

아무렴요 아무렴요

 

아무래도 고된 날에는

일하기 싫어요, 라는 팻말을 걸고 문을 닫아요

 

먼 구원과 가까운 망각 사이, 당신

모든 기억이 표백되는 겨울은 두번째 생이다

 

눈부신 날 이토록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에 놀러오세요

무엇이든 표백 가능합니다

그림자조차 없는 문장, 너무 투명하여

 

* 알베르 카뮈

 

                      -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 2019

 

 

 

 

 

 

 

 

 

* 당신의 세탁소는 참 아름답다.

무엇이든 하얗게 빨아서 말리고 반듯하게 다리미질까지 해주니 말이다.

우리 주위에는 세탁소 같은 사람이 더러 다.

잘 견디게 해주고 구원과 망각조차 하얗게 표백을 해준다.

눈부신 날보다 더 눈부시게 세탁을 해주는 사람,

두번째 생도 잘 견디며 사는, 당신의 문장 덕에

나도 잘 견딜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