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문지르다 [이향란]

JOOFEM 2022. 8. 24. 17:55

 

 

 

문지르다 [이향란]

 

 

 

 

  이별 속으로 숨어버린 사람을 문질렀더니 돌아왔다.

탱탱한 얼굴로 미끄러지듯 거짓말을 하듯 걸어 나갔던

3 출구로 다시

 

  죽은 나무의 뽑힌 영혼을 문질렀더니 새콤달콤한 잎들이

혀를 내둘렀다. 기막히네. 대체 어떻게 알았지?  갸웃거리

표정들로 수선거렸다.

 

  찰랑,  시냇물을 문질렀다. 물고기를 밟고 찰방찰방 이끼

돌들과 걸핏하면 빠져 죽던 구름과 서슬 퍼런 시간이

줄기를 털며 세차게 솟구쳤다. 물속에 가라앉아 울던 수초

눈물을 멈췄다.

 

  허공을 문질렀다. 옅은 통증에 감는 것들. 아하, 밤은

그렇게 오는 거구나. 어둠은 제가 밤이라는 처음

휘청거리며 가시 같은 빛을 얼른 뱉어 냈다. 순간, 별들

일제히 빛났다.

 

  서로가 서로를 문질러 대는 꽃밭

  그곳을 들여다보던 나는 말할 없는 향을 뒤집어쓰고

나비가 되었다. 공중의 한가운데를 날개로 문질렀다. 한바

비를 쏟고야 말겠다는 회색 구름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여전히 알지 못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문질러야 하는 무엇에 대해. 그러므로

추지 않고 서두르지도 않고 끝까지 알수 없는 것들을 계속

문질러 댔다.

 

                    - 뮤즈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천년의시작, 2022

 

 

 

 

 

 

 

 

 

* 어릴 때, ‘엄마 배가 아파요.’ 하고 말하면 엄마는 아픈 배를 문질문질 문질러 주고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배는 나았다.

 

문지르는 것을 한자로 표현하면 애무(愛撫)인데 요즘은 스킨십이라고 한다.

영어도 아닌 스킨십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학문적으로 많이 쓰다보니

이제는 영어사전에 아예 등재가 되어버렸다.

애무는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니 손으로 문지르는 게 되겠지만

마음으로 서로 문지르는 것은 교감 내지는 관계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꽃밭에서 향을 뒤집어 쓰고 나비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기적이지만 

엄마가 문질러준 배가 낫게 되는 것과 같으니 기적은 사랑의 결과물이 아닐까.

 

보름달 뜨고 달맞이꽃이 발꿈치 들면 여기저기 문질문질 기적이 일어나겠다.

 

 

** 시와편견 2022 가을호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