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위대한 것들은 달그락거리지 않는다 [송종규]

JOOFEM 2022. 9. 2. 15:24

담요를 두르고 있는 루이14세?

 

 

 

 

 

위대한 것들은 달그락거리지 않는다 [송종규]

 

 

 

 

   《왕정 시대는 위대한 시대였다》로시작되는 「라

이프 인간 세계사」의 서문을 읽는다 위대한 시대

였다라는 말의 단호함에 걸려, 나는 쉽게 넘어진

다 넘어진 나는 루이 14세와 포르테 대제의 발 밑

으로 가서 잠시 엎드린다

   오늘 위대한 17세기 군주들의 침실은 무엄하게

열려 있다 창밖에는 비가 오는 듯, 자동차의 바퀴

소리가 빗소리와 섞인다

 

   이 비 그치고 나면 마침내, 앙상한 나뭇가지

의 우수와 함께 긴긴 겨울은 시작될 것이다 적막

과 혼란의 밤은 언제나 길었고 빛나는 것들은 짧

은 한 순간, 스쳐 지나갔다······ 루이 14세가 실천

한 절대주의는 국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지

적, 예술적 활동까지 눈부시게 개화시켰다······ 힘

겹게, 루이의 업적에 밑줄을 긋는 동안 행여나 하

고 기다리던 그대 소식은 들리지 않고 몇 차례 전

화벨 소리가 무엄하게, 17세기 군주들의 옷자락을 

들어올린다

 

   열려 있는 것들의 이 가벼움! 그들의 침실은 빗

소리에 젖어 축축하고, 어느 까마득한 심연에서부

터 흐린 발자국 소리가 달려와서 덜커덩, 문고리

를 흔든다

   세상은 가끔씩 바람 소리나 발자국 소리에도 이

렇게 흔들렸고 나는, 오지 않는 그대 소식 때문에

문고리처럼 달그락거린다 군주들의 옷자락을 들어

올렸던 것은 문고리처럼 달그락거리는 내 기다림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위대했다, 길고 긴 겨울밤과 결빙의 시

간들과 위대한 왕정 시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

리지 않는 것들은 달그락거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그들과 결별하기로 한다 유리창에 와서

부서지는 물방울들의 저 눈부심

   내 삶은 언제나 작고 빛나는, 짧은 한 순간을

위해서 들풀처럼 흔들렸다 안녕! 수세기 녹슨 빗

장을 열고 독수리 한 마리 날아오르고 그대 기다

리는 오후 한 때, 깃털처럼 향기로운 이 가벼움

 

                  - 고요한 입술, 민음사, 1997

 

 

 

 

 

 

 

 

* 초등학교 입학하고 처음 만난 선생님은 참 위대했다.

아는 것도 많았고 말 한마디로 우리는 앞으로 나란히!를 잘 했고

시키는대로 잘 해야 했다.

선생님은 화장실도 안 가고 밥도 안 먹는 줄만 알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하! 화장실도 가고 밥도 잘 먹는구나, 했다.

초급장교 교육을 받을 때 사병들한테는 절대 화장실 가는 걸

보이지 말라고 배워서 똑같은 사람인데 굳이 그렇게 하라고?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물론 시키는대로 그렇게 하긴 했지만.

신비주의가 위대함을 낳긴 한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모든 문명이 너무나 발달해서 감출 수 있는

게 없고 위대함은 시시함으로 전락해서 그 어느것도 위대하지 않다.

요즘 대통령들은 말 실수 하나도 꼬집히고 대통령 가족의 브로치까지도

욕먹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독수리처럼 날아올라봐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이 가벼움의 시대다.

 

날아오르지 말고 아주 가끔씩만  얼굴 내비치고 화장실 가는 것도 보여주지 말고

오직 신비주의를 유지하며 달그락거리지 말기를 바란다. 이 시대의 위대한 분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