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것들은 달그락거리지 않는다 [송종규]
위대한 것들은 달그락거리지 않는다 [송종규]
《왕정 시대는 위대한 시대였다》로시작되는 「라
이프 인간 세계사」의 서문을 읽는다 위대한 시대
였다라는 말의 단호함에 걸려, 나는 쉽게 넘어진
다 넘어진 나는 루이 14세와 포르테 대제의 발 밑
으로 가서 잠시 엎드린다
오늘 위대한 17세기 군주들의 침실은 무엄하게
열려 있다 창밖에는 비가 오는 듯, 자동차의 바퀴
소리가 빗소리와 섞인다
이 비 그치고 나면 마침내, 앙상한 나뭇가지
의 우수와 함께 긴긴 겨울은 시작될 것이다 적막
과 혼란의 밤은 언제나 길었고 빛나는 것들은 짧
은 한 순간, 스쳐 지나갔다······ 루이 14세가 실천
한 절대주의는 국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지
적, 예술적 활동까지 눈부시게 개화시켰다······ 힘
겹게, 루이의 업적에 밑줄을 긋는 동안 행여나 하
고 기다리던 그대 소식은 들리지 않고 몇 차례 전
화벨 소리가 무엄하게, 17세기 군주들의 옷자락을
들어올린다
열려 있는 것들의 이 가벼움! 그들의 침실은 빗
소리에 젖어 축축하고, 어느 까마득한 심연에서부
터 흐린 발자국 소리가 달려와서 덜커덩, 문고리
를 흔든다
세상은 가끔씩 바람 소리나 발자국 소리에도 이
렇게 흔들렸고 나는, 오지 않는 그대 소식 때문에
문고리처럼 달그락거린다 군주들의 옷자락을 들어
올렸던 것은 문고리처럼 달그락거리는 내 기다림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위대했다, 길고 긴 겨울밤과 결빙의 시
간들과 위대한 왕정 시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
리지 않는 것들은 달그락거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그들과 결별하기로 한다 유리창에 와서
부서지는 물방울들의 저 눈부심
내 삶은 언제나 작고 빛나는, 짧은 한 순간을
위해서 들풀처럼 흔들렸다 안녕! 수세기 녹슨 빗
장을 열고 독수리 한 마리 날아오르고 그대 기다
리는 오후 한 때, 깃털처럼 향기로운 이 가벼움
- 고요한 입술, 민음사, 1997
* 초등학교 입학하고 처음 만난 선생님은 참 위대했다.
아는 것도 많았고 말 한마디로 우리는 앞으로 나란히!를 잘 했고
시키는대로 잘 해야 했다.
선생님은 화장실도 안 가고 밥도 안 먹는 줄만 알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하! 화장실도 가고 밥도 잘 먹는구나, 했다.
초급장교 교육을 받을 때 사병들한테는 절대 화장실 가는 걸
보이지 말라고 배워서 똑같은 사람인데 굳이 그렇게 하라고?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물론 시키는대로 그렇게 하긴 했지만.
신비주의가 위대함을 낳긴 한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모든 문명이 너무나 발달해서 감출 수 있는
게 없고 위대함은 시시함으로 전락해서 그 어느것도 위대하지 않다.
요즘 대통령들은 말 실수 하나도 꼬집히고 대통령 가족의 브로치까지도
욕먹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독수리처럼 날아올라봐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이 가벼움의 시대다.
날아오르지 말고 아주 가끔씩만 얼굴 내비치고 화장실 가는 것도 보여주지 말고
오직 신비주의를 유지하며 달그락거리지 말기를 바란다. 이 시대의 위대한 분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