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그러니까 시는 [진은영]

JOOFEM 2022. 9. 25. 17:32

 

 

 

 

그러니까 시는 [진은영]

 

 

 

 

우리가 절망의 아교로 밤하늘에 붙인 별

그래, 죽은 아이들 얼굴

우수수 떨어졌다

어머니의 심장에, 단 하나의 검은 섬에

 

그러니까 시는

제법 볼륨이 있는 분노, 그게 나다! 수백 겹의 종이 호랑이가

레몬 한 조각에 젖는다

성냥개비들, 불꽃 한 점에 날뛴다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시는

여기 있다

유리빌딩 그림자와

노란 타워크레인에서 추락하는 그림자 사이에

도서관에 놓인 시들어가는 스킨답서스 잎들

읽다가 덮은 책들 사이에

빛나는 기요틴처럼 닫힌 면접장 문틈에

 

잘려 나간 그림자에 뒤덮여서

돋아나는 버섯의 부드러운 얼굴

 

그러니까 시는 

돌들의 동그란 무릎,

죽어가는 사람 옆에 고요히 모여 앉은

 

한밤중 쏟아지는

폐병쟁이  별들의 기침

언어의 벌집에서 붕붕대는 침묵의 말벌들

 

이 슬픔의 앙상한 다리는 어느 꽃술 위에 내려앉았나

내 속에 매달린

영원히 익지 않는 검은 열매 하나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 그러니까 시는!

마치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주먹을 하늘에 올리며 

억울한 죽음을 돌려달라는 시위 같기도 하다.

올해에도 억울한 죽음(불이 나서 죽고, 비가 많이 와서 죽고, 군대 가서 죽고......)

작년에도 억울한 죽음(산불이 나서 죽고, 태풍이 불어서 죽고, 군대 가서 죽고......)

반복되는 죽음에도 뭔가 개선되는 건 보이지 않고 시위를 할 뿐이다.

백년 전에도, 천년 전에도, 그보다 훨씬 전에도 있었던 일들이다.

억울하니까 한이 되고 한을 안고 죽으니까 어머니의 가슴에 맺혀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는,

맺힌 걸 풀어주고 안아주고 놓아주고 

그러니까 시는,

노래하며 춤추며 해마다 나를 찾는 것 아닌가. 나를 용서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시는,

억울하거나 억울하지 않거나 무심한 것 아닌가.

자연처럼 무심한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