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JOOFEM 2022. 11. 26. 10:29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 초록거미의 사랑, 창비, 2006

 

 

 

 

 

 

* 한때는 사랑했는데 그땐 잘 모르고 한 사랑.

세월이 지나고 돌아보면 사랑했었다, 과거형이다.

빈 의자에 더이상 앉아있을 수 없을 때 사랑했었다는 마음만 반들반들하게 남는다.

사랑이 충만했을 때는 그 귀함을 알지 못하다 빈 의자를 보고 나서야 

사랑의 귀함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이 지금, 여기에 남아 온전히 '너를 사랑한다'라고 현재형으로 치환하여 말한다.

오오, 사랑의 귀함을 이렇게라도 기억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