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송종규]
눈사람 [송종규]
늦은 아침상에 네 사람이 둘러앉는다
바깥은 대설주의보
꽁꽁 언 발을 들고 추어탕 그릇 속으로
섬진강의 미꾸라지들이 뛰어 들어온다
네 사람이 모두 밥그릇을 비우고 나자, 누군가
《그윽한 아침이었다》고 낮게 말한다
고들빼기 갓김치 미나리 갈치 속 젓 정갈한
南都의 아침상이 문득 그윽하고! 환해진다
바깥은 대설주의보
발바닥에 체인을 감고
눈사람 두 사람이 더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와 마주앉는다
미꾸라지 언 발이 지글지글 끓는, 새집식당 좁은 구들장이
모락모락 녹는다
한 장 남은 달력 속 여자가 입김을 불며 녹아 내린다
어떤 회한의 삶도
더러는 녹아서, 송편처럼 다시 빚어질 수는 없는 것일까
바깥은 폭설주의보
무덤들이 말랑말랑해진다 지글지글
주검들이 끓어오른다
녹지 않으려고
여섯 사람이 미끌미끌 흔들흔들
마음 바깥으로 걸어 나간다
- 녹슨 방, 민음사, 2006
* 진짜 오랜만에 추위가 오고 눈이 많이 내렸다.
어린 아이들은 신이나서 눈썰매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어른들은 출근차량들이 엉금엉금 기어서 지각을 걱정했다.
며칠째 눈이 쌓이고 길은 뽀드득거렸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옹기종기 모여앉아 고들빼기 갓김치에 추어탕도 좋고
굴 듬뿍 든 매생이국도 좋다.
대설이든 폭설이든 그 안에 갇혀 잠시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도 좋다.
눈사람 만드는 낭만적인 아이들이 없으니
그냥 사람들이 눈사람이 되어 눈길을 지치며 낭만적인 사람이 되면 더없이 좋겠다.
생전 안끼던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두르고 가디건까지 입으며 두툼한 눈사람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