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씨앗 [이성희]
JOOFEM
2023. 3. 3. 21:07
씨앗 [이성희]
나는 모른다
왜 그렇게 많은 다른 시간과 다른 일생들이
이 순간 서로를 스치며 지나가는지
나는 모른다
어떻게 홀로 뻗은 봄날 여린 나무 가지 하나가
평면 공간을 입체로 만드는지
왜 꽃이 벼랑에 피는지
칠이 벗겨진 벽에 왜 이끼가 끼는지 나는
모른다
비탈길 가득 은행잎들이 떨어져 내릴 때
뿌리에 밀려와 있는 바다는 왜 침묵하는지
허공에 손을 내밀면 녹아버리는
무슨 내밀한 신호 같은 눈들이 가득 날리는 겨울날
왜 씨앗은 그토록 작고 어두운 곳에서 꿈꾸는지
왜 내가 시를 쓰는지
- 스미다, 김수우 엮음, 2016
* 비파나무 화분에 뽀리뱅이가 뻔뻔스럽게 서식하더니
하얀 씨앗들을 날려 이웃 화분에 옮겨가 또 꽃을 피우고
계속 계속 종족을 보존시켰다.
비파나무가 제법 자라니 뽀리뱅이는 궁리 끝에 다른 쪽 빈 화분 하나를 차지했다.
올 겨울 내내 자라더니 흩어졌던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나라를 되찾듯이
빈 화분에서 뽀리뱅이 국가를 이루고 노란 꽃과 하얀 씨앗들이
잘 뻐대고 있다.
잡초지만 훌륭한 민족이다. 뽀리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