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꽃 시 모음
이팝나무 꽃 피기 전에 [정일근]
처음엔 푸른 무정형의 눈물이었다
연초록으로 빚은 둥근 눈물 속에 무엇이 숨었나
국천척지跼天蹐地 조심조심 궁극을 받들어 들여다보니
잎이 되기 전의 하늘의 자궁이
땅의 꽃을 위한 정은正銀의 태몽 꾸고 있었다
여기서 가까운 신라가 알에서 나왔듯
여기서 더 가까운 가야가 알에서 나왔듯
신전리 이팝나무*는
숭어리마다 신화의 알 감추고
꽃 피는 오월 부르고 있다.
* 양산 상북 신전리 이팝나무. 1971년 천연기념물 제 234호 지정.
- 시안, 이천십삼년 여름호
참을 수 없을 만큼 [황동규]
사진은 계속 웃고 있더구나, 이 드러낸 채.
그동안 지탱해준 내장 더 애먹이지 말고
예순 몇 해 같이 살아준 몸의 진 더 빼지 말고
슬쩍 내뺐구나! 생각을 이 한 곳으로 몰며
아들 또래들이 정신없이 고스톱 치며 살아 있는 방을 건너
빈소를 나왔다.
이팝나무가 문등(門燈)을 뒤로하고 앞을 막았다
온 가지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밥풀을 가득 달고.
'이것 더 먹고 가라!'
이거였니,
감각들이 온몸에서 썰물처럼 빠질 때
네 마지막으로 느끼고 본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동체(胴體) 부듯 욕정이 치밀었다.
나무 앞에서 멈칫하는 사이
너는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 들었다.
- 꽃의 고요, 문학과지성사, 2006
팽나무를 포구나무라고 부른 까닭 [고두현]
―물건방조어부림 3
어떻게 숲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을까
오래된 일이지만 예전부터 궁금했지.
이 숲 속 팽나무를 우린 포구나무라고 배우며 자랐지.
소금기에 강해 포구(浦口)에서 쑥쑥 큰다고.
포구 열매에선 늘 풋내가 났지.
푸조나무는 어때? 오래오래 푸근하고 넉넉하고
편안한 그늘 드리워 준다고 그렇게 불렸대.
이팝나무 꽃은 입하 무렵에 피지. 흰 쌀밥 닮은 이팝 꽃잎.
고봉밥처럼 풍성히 피어야 풍년 든다고 아버진 말씀하셨지.
아 보리밥나무도 있네. 씨 모양이 보리밥 같아 그렇게 부르는
보리수나무,보리똥나무, 볼레나무…………
그러고 보니 모두 먹는 타령이군.
비바람 해일 풍랑 다 막아 주고
긴 숲 그림자로 물고기까지 불러들이는
물건방조어부림에 와 보면 왜 그런지 알게 되지.
그 숲 참느릅나무 그늘 아래 숨죽이고 앉아
손가락 걸어 본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말이야.
- 달의 뒷면을 보다, 민음사, 2015
이팝나무 꽃 [정한아]
잠든 크루소 씨의 눈꺼풀 밖으로 비어져 나온
이팝나무 꽃잎들을
시궁쥐가 먹어치우고 있다
나비야, 너에게 이름을 준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와서 좀 보렴
그는 이팝나무 꽃잎들로 고치를 짓고 있구나
그 고치가 그의 안전가옥이구나
아름다움으로는 허기가 사라지지 않는구나
- 울프 노트, 문학과지성사, 2018
나는 조각배 [김용택]
집에서 놉니다.
노니, 좋습니다.
아파트 정원에 산딸나무 꽃이 피었습니다.
희고 고운 꽃잎들이 초록의 나뭇잎 위에
십자 모양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피었습니다.
초여름꽃은 흰꽃들이 많답니다.
이팝나무 꽃, 층층나무 꽃,
때죽나무 꽃.
때죽나무 꽃은 대롱대롱 매달려 피지요.
꽃술 끝이 노란 그 꽃들도 희고 곱답니다.
꽃이 질 때 그것들을 오래오래 바라보면
내 몸에 실린 짐들을 하나둘 몸 밖으로 던지는 꿈을 꿉니다.
마음의 짐을 다 내려놓으면 눈이 저절로 감깁니다.
눈이 감기면 내 몸은 빈 배가 되어
어느 먼 곳으로 기우뚱기우뚱 떠갑니다.
한없이, 한이 없이, 좋습니다.
순수한 바다, 먼 수평선 너머로 나는 나를 놓고 깜박 꺼져서.
그래요.
그렇게 당신의 발뒤꿈치에 가만히 가닿고 싶은
나는
한 조각
빈 배지요.
-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창비, 2013
세상의 모든 밥[허문영]
혼자서 찬밥을 먹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밥 종류가 무척이나 많다
고봉밥 국밥 햅쌀밥 잿밥 된밥 이밥 약밥 쌀밥 고두밥 제삿밥 보리밥 콩밥 까마귀밥 맨밥 더운밥 진밥 잿밥 주먹밥 김밥 눌은밥 눈칫밥 까치밥 따로국밥 식은밥 개밥 기름밥 짬밥 오곡밥 장국밥 팥밥 좁쌀밥 소나기밥 불공밥 주먹밥 개밥 한솥밥 절밥 헛제삿밥.....
이것 말고도 수십 가지는 더 있을 듯한데
밥이 희망이 되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소금물에 볍씨를 띄울 즈음
잘디 잔 흰 꽃을 쌀밥처럼 매단 조팝나무가
지천으로 산기슭에 꽃을 피우면
해거름에 허기진 하얀 밤이 어느새 오고
마을 어귀 이팝나무도 내가 질세라
흰 쌀밥 같은 꽃을 잎새 위에 가득 얹었다
막 지어낸 하얀 밥을 사발에 퍼담다가
손가락에 묻은 밥알을 입으로 떼어먹으시며
정성으로 쌓아주던 고봉밥은
밥상 위에 하얗게 핀 조팝나무, 이팝나무 꽃 무더기
어머니의 환한 미소로 피었다
혼자서 찬밥을 먹다가
살강 위에 삼베보자기 들추고 꺼내 먹던
보리밥 생각에 목이 메이고
여기저기서 먹었던 눈칫밥에 마음 서러워지고
부모님 제삿밥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무리 찬밥이라도
뜨거워지지 않고 되는 밥이 어디 있던가
세상의 모든 밥은
뜨거움 속에서 익은 것이다.
- 이티氏, 2009 a4 동인지
지독한 사랑 / 송종규
그 방은 침묵 속에 쌓여 있고 그 방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그 방은 너무 휑하고 그 방에는 너무 가벼운 내가 있을 뿐인데 그 방은, 꽉 차 있다
그 방은 혼돈으로 꽉 차 있고 그 방은, 가혹하거나 간절한 말들이 터질 듯 팽창해 있다
그 방에는 수많은 말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고, 우울하거나 신경질적으로 걸려 있고
그 방의 혼돈 속에 있을 때
나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고 그 방에 있는 동안 나는
안전하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의 말들은 내가 다가가면 부스러지고
내 손이 닿기 전에 아득하게 달아난다
농밀하던 그 방의 평화와 혼돈은 한순간에 허물어진다
나는 떠나버린 그들의 등 뒤에 텅 빈 채 서 있거나 그 방처럼 나도, 터질 듯 팽창하기를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침대 밑에, 서랍 속에, 벽 속에 숨어 있던 말들이 다시, 그 방을 가득 채우기까지
아니, 내가 이팝나무처럼 터져 새하얀 말들이 내 안 가득 흩날리기까지
커다란 허공이 시간과 대치하고 있는 동안
내 안의 문들은 차례로 빗장을 닫아건다
- 녹슨 방, 민음사, 2006
* 입하가 되어야 피는 꽃인데 요즘 2주 먼저 피어 가로마다 고봉밥이 그득하다.
가난하고 먹을 게 귀하던 시절에나 고봉밥을 즐겨찾기했겠지만
요즘 하얀 쌀밥은 잘 먹지 않는다.
그 많던 쌀밥은 누가 먹고 있으려나.
빵이나 다른 식사를 즐겨찾기하는 세상이라 쌀농사는 꽝 된지 오래다.
밥이 보약이고 밥정으로 산다던 시대가 가고 다들 뭘 먹고 살고 있을까.
가로마다 그득한 고봉밥, 보기만 해도 눈이 그득그득 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