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바닷가 풍습 [허연]

JOOFEM 2023. 5. 5. 08:33

 

 

 

 

 

바닷가 풍습 [허연]

 

 

 

 

마음 크게 먹고 당신을 또 용서하지만

그래서 늘

시시한 일로 돌아가지만

소금을 물에 녹이듯

굴욕을 한입 가득 물고

파도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나는 어두운 열매를

눈물 없이 먹을 수 있을 줄 알았고

나는 여전히 당신의 밀도에 녹는다

그래서 늘

녹초가 되어 바다로 온다

거품을 물고 쓸려 와 모래 틈으로 사라지는 것

파도 같은 것

나도 사라지고 기억도 사라지는 것

어쨌든 나는 평생 사라지는 것

파도의 이야기에는 늘

덜 아문 흉터가 있고

바닷가 풍습에 나는 걸핏하면 화를 낸다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사, 2020

 

 

 

 

 

 

 

 

 

* 넓은 바다를 보면 넉넉한 물과 밀려갔다 밀려오는 반복에

그리고 저 수평선이 하늘과 닿아있다는 신기함에 

바다가 참 살기 좋은 곳이야!

라고 하지만 똑같은 일상이라면 도망갈 궁리를 할 것 같다.

바닷가에 돗자리 깔고 며칠 있다보면 궁뎅이가 근질거리고

무료하고 이제 알 것 다 알아서 더이상 있고 싶지 않을 게다.

바닷가에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은 그나마 궁뎅이가 무거워

그러려니 살아가겠지만 이 바닷가의 풍습에 젖지 않은 사람들은

떠나야 해! 외치며 게처럼 빠른 걸음으로 도망칠 테다.

 

누구나 자기 환경에서 풍습(하위문화)에 젖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파도가 파!하고 화를 내듯 가끔은 풍습에서 벗어난 곳으로 떠나야 한다.

걸핏하면 떠나는 게 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