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아무도 모르고 누구나 아는 [문혜연]

JOOFEM 2023. 6. 11. 22:13

우물가의 여인, 이태운 화가 그림(인터넷에서 업어온 그림)

 

 

 

 

아무도 모르고 누구나 아는 [문혜연]

 

 

 

 

오늘 밤은 공기에서 종이 냄새가 나요

나뭇잎들이 가장 예쁠 때

젖은 몸을 던지는

 

어떤 새의 발톱은

나무를 붙들기 위해서만 쓰인다던데

 

나무들은 대체 언제부터

밤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었을까요

깊이도 무게도 알 수 없는 

둥지 하나를 매단 채로

 

손목에 새를 새긴 아이는

밤새 손목이 두근거려서

밤을 없애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이 밤을 마지막으로

 

밤이 사라진 세계에는 

실수가 없고 꿈이 없어서

나무들이 하얗게 세어 버려요

 

노인이 아이의 등을 쓸어줍니다

아이는 자신의 온 등으로 

노인의 나무껍질 같은 손바닥을 느껴요

가끔 둥글고 뜨거운 게 내려가고

 

새를 잃어버린 어른들은

숲에 말간 손목을 감춰요

나무는 점점 더 희고 묽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이곳은 흰 나무들의 숲

젖은 종이 냄새가 나요

훗날 발견될 글자들처럼

 

새를 주운 아이는

손안의 심장이 뛰는 리듬을 잊지 못합니다

지그시 눌러보면 두근거리는

 

돌아갈 밤이 없는 아이는

둥지를 더듬습니다 까치발로

새들의 둥근 어둠을 훔치고

 

흰 나무에 남은 줄무늬 같은

흔적만이 그 밤을 기억합니다

노인은 자기 손바닥을 쓸어보며

작은 등 하나를 기억하고요

 

아이가 사라진 세계는

붙잡혀본 적 없는 손목들만 남아서

긴 소매 속으로자라나는 어둠

 

낮과 낮과 낮의 사이로

문득 겨울이 옵니다

떠나거나 떠나지 않거나 그렇게

때를 놓친 새들은 살아가는데

 

 

                - 일곱번째 감각-ㅅ, 여우난골, 2023

 

 

 

 

 

 

* 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지나가던, 갓을 쓴 남자가 우물가에서 처녀에게 물 한그릇을 부탁한다.

처녀는 물 한그릇을 떠서 버드나무 잎사귀 하나 띄워  남자에게 고개 돌려 내민다.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물을 마시더니 처녀의 손을 덥석 잡는다.

3류 영화 같은 장면일까.

고개 돌리고 있던 찰나에 손목을 잡혔으니 줄 건 다 준거나 마찬가지.

 

옛날 얘기니까그렇지 요즘 손목 잡혔다고 다 준 건 아니지만 

손목과 손목이 한참을 느꼈다면 밤새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리듬을 잊지 못해 밤을 샐 것이다.

 

떠나거나 떠나지 않거나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나면,

지나간 버스를 향해 손 흔드는 격이다.

요즘 세대들, 절반은 혼자 살겠다고 장담하며 긴 겨울을 나고 있으니

소는 누가 키우고 새는 누가 찾나,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