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고 누구나 아는 [문혜연]
아무도 모르고 누구나 아는 [문혜연]
오늘 밤은 공기에서 종이 냄새가 나요
나뭇잎들이 가장 예쁠 때
젖은 몸을 던지는
어떤 새의 발톱은
나무를 붙들기 위해서만 쓰인다던데
나무들은 대체 언제부터
밤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었을까요
깊이도 무게도 알 수 없는
둥지 하나를 매단 채로
손목에 새를 새긴 아이는
밤새 손목이 두근거려서
밤을 없애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이 밤을 마지막으로
밤이 사라진 세계에는
실수가 없고 꿈이 없어서
나무들이 하얗게 세어 버려요
노인이 아이의 등을 쓸어줍니다
아이는 자신의 온 등으로
노인의 나무껍질 같은 손바닥을 느껴요
가끔 둥글고 뜨거운 게 내려가고
새를 잃어버린 어른들은
숲에 말간 손목을 감춰요
나무는 점점 더 희고 묽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이곳은 흰 나무들의 숲
젖은 종이 냄새가 나요
훗날 발견될 글자들처럼
새를 주운 아이는
손안의 심장이 뛰는 리듬을 잊지 못합니다
지그시 눌러보면 두근거리는
돌아갈 밤이 없는 아이는
둥지를 더듬습니다 까치발로
새들의 둥근 어둠을 훔치고
흰 나무에 남은 줄무늬 같은
흔적만이 그 밤을 기억합니다
노인은 자기 손바닥을 쓸어보며
작은 등 하나를 기억하고요
아이가 사라진 세계는
붙잡혀본 적 없는 손목들만 남아서
긴 소매 속으로자라나는 어둠
낮과 낮과 낮의 사이로
문득 겨울이 옵니다
떠나거나 떠나지 않거나 그렇게
때를 놓친 새들은 살아가는데
- 일곱번째 감각-ㅅ, 여우난골, 2023
* 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지나가던, 갓을 쓴 남자가 우물가에서 처녀에게 물 한그릇을 부탁한다.
처녀는 물 한그릇을 떠서 버드나무 잎사귀 하나 띄워 남자에게 고개 돌려 내민다.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물을 마시더니 처녀의 손을 덥석 잡는다.
3류 영화 같은 장면일까.
고개 돌리고 있던 찰나에 손목을 잡혔으니 줄 건 다 준거나 마찬가지.
옛날 얘기니까그렇지 요즘 손목 잡혔다고 다 준 건 아니지만
손목과 손목이 한참을 느꼈다면 밤새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리듬을 잊지 못해 밤을 샐 것이다.
떠나거나 떠나지 않거나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나면,
지나간 버스를 향해 손 흔드는 격이다.
요즘 세대들, 절반은 혼자 살겠다고 장담하며 긴 겨울을 나고 있으니
소는 누가 키우고 새는 누가 찾나,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