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드로잉, 앨리스 [김광명]

JOOFEM 2023. 9. 19. 22:35

 

 

 

 

 

드로잉, 앨리스 [김광명]

 

 

 

 

  1

  태어나면서 알았어

  세상은 내가 발명한다는 것을

  돋아나는 귀를 자르며 뛰어다니는 당나귀와 등으로 기

어 다니는 강물과 초침만 돌고 있는 시계탑과 퇴근하지 않

는 한낮

 

  2

  3월에는 붉은 열매가 하늘을 덮었지

  봄이 누군가에게는 추억이겠지만 내겐 한 번쯤 나를 쌍

년이라 불렀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계절

  이상한 나라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앞만 보고 걸을 때 욕

을 먹는 나는 자란다 다 자라면 손톱 때만큼 작다

  작아도 토끼굴에 가려면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망막

이 어울리겠지

 

  3

  고양이가 사는 나무에는 잎이 달리지 않네

  가지 사이로 노란 새들이 배를 부풀려 날고

  지저귐에 맞춰 나를 물어뜯는 

  고양이는 혀가 뾰족한 해부학자

 

  4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칭찬을 먹으러 다녀왔지 심술 가

득한 미나리들이 눈폭풍처럼 휘몰아치네

  어쩌면 세상은 하나같이 들통난 거짓말 같을까

  나는 날마다 미술관에 가고 싶고 생트 빅투아르에 가서

할머니가 되고 싶어 손톱을 깨물 때 물감처럼 내가 번지면

좋겠어

  지금은 살아서 지옥을 스케치하는 시절

 

  5

  이마를 짚으려고 키가 자랐지 하얀 프릴이 달린 앞치마

를 두르고

  너무 자라면 북극에 닿을까 무서워

  자른 머리통을 품에 안고 '밀과 보리가 자라네'를 불러

주었지

 

  6

  난미끄럼틀이 좋아

  떨어져도 즐겁잖아

 

  걱정 마 페티코트를 걸친 꼬마 아가씨

 

  우린 모두

  새소리에 찢어진 구두 한 짝

 

  하늘엔 쪼아 먹다 만 붉은 열매들, 지상엔 내가 돌아갈

집이 모래처럼 널려 있지

 

 

 * 앨리스 증후군: 자신의 몸, 물체 등이 다른 크기로 보이거나 시공간이 왜곡

되어 보이는 증상. 보통 두통을 동반함.

 

 

                - 시로 여는 세상, 2023 가을호

 

 

 

 

* 김광명 시인은 2022년 '시와사상'으로 등단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많이 시를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