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의 신 [김개미]
눈 오는 날의 신 [김개미]
야, 눈 온다!
나에겐
눈을 타고 찾아오시는 신이 있어서
이렇게 눈이 오는 날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답니다
신의 탄성은 내 마음속의 말처럼 여리고 작지만
신이 눈을 맞고 싶어하시므로
나는 신을 모시고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신이 눈을 밟고 싶어하셔서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찾아
숲으로 숲으로 숲으로 들어간답니다
숲에는 언제나 신을 깜짝 놀라게 할
커다란 고목과 커다란 까마귀가 있고
때로 신과 나는 신을 닮은 사슴을 만나기도 한답니다
나의 신은 나랑은 달라서 추위를 타지 않는데
내 신발이 흠뻑 젖고 내 귀가 꽁꽁 얼어도
내 어깨 위에서 소풍 가는 새처럼 웃으신답니다
내가 좋아하는 떨기나무가 걸어다니는 언덕에 이르러
나의 신은 내 어깨에서 내려와 오줌을 누기도 하시지만
이건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되는 비밀이랍니다
내가 바위 밑 옹달샘에 엎드려 물을 마실 때
나의 신은 올해도 내 뒤통수를 누르셨지요
나의 신은 내 코를 옹달샘에 빠뜨리는 걸 좋아하십니다
신이 갑자기 개암나무 가지를 흔들어
나를 눈투성이 거지로 만들어 놓으시면
나는 비명을 지르지만 신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오솔길에 누워 도랑 같은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진흙으로 빚어 말린 구슬 같은 신의 웃음소리를 듣습니다
그때 나는 신의 몸에 무례하게 쏟아지는 눈송이를 잡으
려 애쓰지요
내가 엄지와 검지로 천사의 가루 같은 눈송이르 잡으면
신은 기뻐하시며 상을 내려주기도 하신답니다
나무가 점점 더 빽빽해지고 하늘조차 없는 곳까지 가면
그때야 신은 장난을 멈추고 신으로 돌아오십니다
캄캄해진 나의 눈과 귀에 빛을 한 땀 찔러넣어
내가 길을 찾도록 도와주시지요
물론 가끔은 나를 숲에 버려두고 혼자서 가버리기도 하
시지만요
나에겐
말썽꾸러기 아기 같은 작은 신이 있습니다
그분이 눈을 좋아하셔서
이렇게 눈이 펑펑 오는 날 나는 바빠서 놀지도 못한답니다
- 작은 신, 문학동네, 2023
* 인간과 신이 함께 산다면 인간이 신에게 장난을 걸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신이 장난을 치고 인간을 괴롭혀도 신을 원망할 수는 없을 게다.
신은 때로 천사 같기도 하고 사탄 같기도 해서
신은 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으로선 이건 선이야! 이건 악이야! 할 수 있지만
신은 절대적이어서 모든 것이 선일 뿐이다. 리얼리?
아가를 키워 보면 아가는 모든 게 선이긴 한데 때로 악이기도 하다.
실은 선과 악을 모르는 게 아가이다.
아마도 작은 신도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