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모두 모여 태양 모양 [손유미]

JOOFEM 2023. 12. 20. 10:54

 

 

 

 

 

모두 모여 태양 모양 [손유미]

 

 

 

 

  우리는 평화로워라

 

  한밤에도 붉게 빛나는 대추나무 아래를 지날 때 우리의

작은 태양이 주렁주렁 열렸구나 다복하게도 열려서 이 길을

비춰주네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돌아가고 있었다 또다른 둥

근 태양을 사 들고 우리 집에 가면 이 태양을 갈라 나눠 먹으

며 부분일식 개기일식 사라진다 다 먹었다 하자 다만 손을

타고 흐르는 붉고 맑은 물만 남았다고 그러나 우리는 알지

우리에겐 또다른 태양이 남아 있다는 걸 내일도 내일의 내

일의 내일이라도 따듯한 기운을 채워줄 붉고 둥근 불운

 

  아닌 것들이

  있어 그런

 

  생각을 하면 허리가 곧추선다 목이 길어지고 잘 씻은 청

포도알처럼 이마가 깨끗해진다 우리

 

  평화롭지? 평화로워라 우리 평화롭지? 안전하다 대수롭

지 않다 의연하다 나란하고 가지런하다 카세트테이프처럼

보리냉차처럼 우양산처럼 식물원처럼 채광처럼 소포처럼

뜰처럼 우리 좋아하는 말들을 반복해서 걸어나갈 때 별안간

주위를 채우는

 

  붉은 트랙을 달리는 러너의 땀방울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농구공

  뛰는 아이들의 볼 뺨

  아이가 넘어진다 무릎이 까진다 딱지가 앉는다 그리고

  새살이 돋기까지 얼마간의 시간

 

  그걸 바라보는 오후 고양이의 홍채 얇아짐 가늘어짐 길

어짐

 

  긴

 

  비가 온다

 

  한소끔 식히러 이 모든 풍경을

  타고 흐르는 붉지

  않고

 

  비가 내려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그래서

  우리도 돌아가고 있었지

 

  붉고 둥근 불안

  아닌 것들을 

  가지고

 

 

       - 탕의 영혼들, 창비 2023

 

 

 

 

 

 

 

* 태양이 있는 한,

우리는 소소하고 가장 평화로운 일상을 살고 있다.

태양으로 인해 만물은 꿈틀거리고 조금씩 자라고 변화하고 

따듯했다 말았다 나눠먹었다 살아내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평화로워라'였다.

지지고 볶고 사는 일상속에서도 가끔 내리는 비가 차분함을 주고

기운 차리게 하는 힘을 준다.

태양을 닮아 쿵쾅거리는 나의 심장이 자연스럽게 평화를 누리고 있다.

아니, 수고하고 있다.

 

우리는 평화로워라.

자연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