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밀가루의 맛 [이혜미]

JOOFEM 2024. 1. 2. 22:11

 

 

 

 

 

밀가루의 맛 [이혜미]

 

 

 

 

얼음을 핥으며 오래 말을 아꼈지

케이크를 자르고 낮술을 마시던 창가에서

 

그 희고 연약한 윤곽을 망쳐놓으며

너는 없는 아름다움을 말했다

무심히 손을 휘저으며

미음과 리을 받침에 대해 이야기했지

 

나는 알곡처럼 선연하다 분명하여 부서지는 것들에 대해

같은 크기의 입자가 되어가는 것들에 대해

 

왜 부서져 떠돌다 싫은 덩어리로 마무리 되는 것일까

 

입으로 불어도 손으로 쓸어도 자국을 남기던 눈송이들

얼어붙은 잔설이 회색으로 얼룩진 그 창가에서

 

흰 가루라면 무엇이든 슬프던 계절이 지나간다

 

눈처럼 녹아 사라질 줄 알았는데

끈질기게 혀에 붙어 끈적이는

더럽고 슬프고 무거운

 

 

            -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 아버지가 민방위대장이라 새벽같이 나가서 민방위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밀가루 한 포대를 들고 오셨다.

새마을운동이라고 거리를 청소하고 또 밀가루 한 포대를 들고 오셨다.

뭐만 하면 밀가루를 주는 동사무소는 참 좋은 곳이었다.

하얀 밀가루는 반죽해서 수제비를 떠먹고 또 반죽해서 손칼국수를 만들어먹고 

잘 익은 김치 있으면 김치전을 해먹고.

어머니는 하얀 밀가루로 어린 형제의 입을 즐겁게 하는 마술사였다.

그 마술 덕분에 머리가 하얘지긴 했지만

지금도 밀가루로 만든 것들은 끈질기게 혀를 즐겁게 하고 있다.

 

아, 어렸을 때 먹던 삼립 크림빵이 10원이었는데 그게 아직도 마트에 가면 판다.

둥글고 넓적한 빵과 빵사이에 하얀 크림. 

혀로 핥아먹을 때 행복지수가 최고조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