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기억을 버리는 법 [김혜수]
JOOFEM
2024. 12. 23. 20:34
기억을 버리는 법 [김혜수]
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
상자 속에 넣어 높은 곳에 올려놓는다
가끔 시선이 상자에 닿는다
쳐다보고만 있자니 좀 그런 것들을
더 큰 상자에 넣어 창고 속에 밀어버린다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모서리가 삭아내리는 것들
자주 소멸을 꿈꾸며
닳아 내부조차 지워져버린 것들
가끔 생각이 창고에 닿는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점차
생각조차 희박해지고
창고를 넣을 더 큰 상자가 없을 때
그때 상자 속의 것들은 버려진다
나도, 자주, 그렇게 잊혀갔으리라
- 이상한 야유회, 창비, 2010
* 이삿짐을 정리하다 십수권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까맣게 잊어버린 사물함에서 몇십년을 햇빛을 보지 못하다가 이렇게 툭, 나타났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굳이 지금 일기장을 읽어야할 이유는 없다.
그때는 그때의 감정이 있고 지금은 지금의 감정이 있으니 일기장을 펼쳐볼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도 이러다 먼훗날은 모두 소각되어지지 않을까 싶다.
자녀의 손에 의해 버려지거나 그렇게 될 게다.
일기장이 나에게 잊혀졌듯이 나도 그렇게 잊혀갈 게다.
지금도 짧게 카톡에 일기처럼 기록은 하지만 폰을 바꿀 때마다 사라지곤 한다.
금방 금방 잊혀지는 게 맞는 것 같고 그래야 별 고민없이 살게 된다.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순간순간은 행복해진다.
궤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