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괘종시계가 두 번 우는 밤 [박승자]

JOOFEM 2013. 10. 15. 23:15

 

                                                                                                                 살바도르 달리 그림

 

 

 

 

 

괘종시계가 두 번 우는 밤 [박승자]

 

 

 

 

 

 

 

육이오 피난 때 어린 오빠를 잃은 어머니는

동그란 고리가 달린 새장을 늑골에 넣으셨다

새가 울음으로 늑골을 갉을 때마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셨다

대나무 바늘이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고리가 엮어졌다

 

 

빨간 스웨터를 짰다간 다시 풀어 짜시던 어머니

석유곤로 위에 올려진 양은냄비 뚜껑이 요란하게 날갯짓을 하면

구불구불한 생의 길이 한 줄기로 피어오르는 사이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털실은 부풀어 오르고

사막에서 불어온 붉은 먼지들이 방 한 구석으로 쏠려다녔다

 

 

괘종시계는 어느덧 자정을 넘어 두 번 울고

새장 안에 갇힌 새는 언제 날아가나요

꾸벅꾸벅 질문이 모이를 쪼듯 뜨개질의 속도는 점점 더 느려지고

괘종시계 속 밤의 무게는 눈꺼풀 위로 보풀보풀 쌓이는데

스웨터를 짜다 말고 열두 살 계집애 몸에 가늠해보던 어머니는

작구나, 마치 긴 밤을 자르듯 한 마디를 내뱉으시며

평생 우는 새를 늑골에서 꺼내지 않을 양

밤새 짰던 붉은 고리를 다시 풀고 계셨다

 

 

 

 

 

 

*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평생 가슴에 한을 품고 산다.

자식을 낳던 날이 되면 가슴이든 아랫도리든 속이든 아픈데가 많다.

자식이 죽은 날도 그러하리라.

평생 우는 새가 울음을 멈추는 그날까지 한은 풀어지지 않는다.

스웨터를 짰다가 풀었다를 반복하는 건 그만큼 한이 깊다는 말이다.

슬픔과 기쁨이 평형을 이룰 때까지 뜨개질은 괘종시계 안에 있을 게다.

 

 

 

 

** 어디선가 '석유곤로'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하는 걸 보았다.

'곤로'가 일본말이라는 거다.

어릴 때부터 곤로라고 들었지 다른 말로 들은 적은 없다.

시대가 한참 지나서 그게 일본말이니 바꾸라고 강요한다면 바꿀 수야 있겠지만

읽는 시민들로선 그것도 어색할 게다.

익숙한 '곤로'라고 해야 머릿속에서 시적 상황이 그려지는 까닭이다.

시인들이라고 다 문법을 맞추거나 외래어를 안 쓰거나 상식이 풍부한 것은 아니다.

작품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언어가 있으면 그게 그냥 시의 재료인 셈이다.

민들레 홀씨가 어딨냐는 말이나

열무꽃이 정말 존재하냐는 말은 상식이나 어법 혹은 문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지만

그걸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라고 본다.

시인은 때로 없는 말도 창작해 내기때문이다.

 

 - 누군가 물어보네요.
매련 없이,는 미련 없이,가 아니냐구요.
비슷한 말인 것 같은데 윤시인님의 정답을 듣고 싶네요.ㅎㅎ(주페의 질문)

  - 꼭 사전적 의미로 시를 쓸 수 없을 때가 있어요.
정확한, 올바른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고 생각해도
꼭 그 말이어야 할 때가 있어요.
'매련 없이'는 사전에 나오지는 않아요.
하지만 꼭 쓰고 싶고, 그래야 맞는 것 같을 때가 있지요.
매련 없이는 아무런 대책없이, 기약 없이의 의미로 쓴 것인데,
그 늬앙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윤관영시인의 답변)

 

일본에 가면 백제라는 역이름도 있고 백제문화의 잔재가 많은데

우리 말이고 우리 문화이니 지우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전적인 의미로 보지 말고 시적 늬앙스로 보고 토를 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나라이건 이웃나라의 말이 조금은 섞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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