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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심 [이영광]

방심 [이영광] 그는 평생 한 회사를 다녔고,자식 셋을 길렀고돈놀이를 했다바람피우지 않았고피워도 들키지 않았다방심하지 않았다아내 먼저 보내고 이태째혼자 사는 칠십대다낮술을 몇 번이나 나누었는데뭐 하는 분이오, 묻는 늙은이다치매는 문득 찾아왔고자식들은 서서히 뜸해졌지만,한번 오면 안 가는 것이 있다그는 이제 정말 방심하지 않는다치매가 심해지고 정신이 돌아온다입 벌리고 먼 하늘을 보며, 정신이머리 아프게, 점점 정신 사납게,돌아온다 그는 방심이 되지않는다 현관에 나앉아 고개를 꼬고, 새가 떠나면 구름이 다가올 뿐인먼 하늘에 꽂혀 있다꽃 지자 잎 내미는 산벚나무 그늘 밑후미진 꽃들에 들려 있다그는 자꾸 정신이 든다평생의 방심이 무방비로 지워진다한번 오면 안 가는 것이 있다저녁엔 퇴근하는 내게 또 담배를 ..

시와 감상 2026.08.22

빵 가게가 있는 풍경 [허연]

빵 가게가 있는 풍경 [허연] 석양 아래 늙은 노숙자 한 명물끄러미 빵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추억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지나가는 자동차들고여 있던 빗물을뿌려대고 죽음과 무척이나 가까운 화단에선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자목련이 지고 있었다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사, 2020 * 어릴 땐 빵가게가 그게 그거여서 그저 그랬는데지금은 빵가게 주인이 정성껏 새로운 기술로 개발해 맛있는 빵을 만들어 팔기때문에맛있는 빵집과 그냥 빵집으로 구별된다.긴줄 서서 먹는 빵집도 있고 줄은 안 서더라도 빵가게에 끊이지 않게 빵 사러오는 이들이 북적이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한산한 빵집도 있긴 하다. 늙은 노숙자는 맛있는 빵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게다.빵의 맛과는 상관없이 ..

카테고리 없음 2026.08.16

우리들의 천국은 어디 있나 [유기택]

우리들의 천국은 어디 있나 [유기택] 부러 그러진 않았을 테지요누군가 과일 바구니를 엎고 갔어요지나갔지요하느님 맙소사저걸 팔아야 살 수 있어요앞을 보지 못하는 날이 늘 그래요쏟아진 건 다 어디로 굴러갔을까요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하느님께 기도를 좀 해야겠어요하느님은 선한 분이 맞을 거예요신기하네요지나가던 누가 조용히과일을 바구니에 모아 주고 있어요누굴까요 가만히 물어봤어요 고맙습니다. 당신은 내 하느님이신가요? - 겨울에서 겨울까지, 달아실, 2026 * 가끔 술병을 잔뜩 싣고 좌회전 하다 차가 기울어져 원심력으로 나동그라진 술박스들을 주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하나씩 둘씩 거들어주는 장면이 뉴스로 등장하기도 하고어쩌다 돈다발을 날려 바람과 함께 흩어진 지폐를 여기저기서..

시와 감상 2026.08.09

아무도 없지만 아무도 없는 건 아니다 [유병록]

아무도 없지만 아무도 없는 건 아니다 [유병록] 아무도 없이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생각 들 때는내 방을 처음 가졌을 때처럼곧 익숙해질 거라 믿기로 한다 사방 어두컴컴해서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잠 못 드는 나를 위해누가 불을 꺼주었다 생각하기로 한다 어둠 속에서두려움을 달래면 우람한 이가 나타나내 손을 붙잡고 걸어간다가까이 들여다보면지난 어느 날의 내 얼굴이다 내게도 이토록 듬직한 시절이 있었지 몇 발자국 앞에서는누가 자기를 잘 따라오라 말한다가만히 들어보면분명히 내 목소리다 내 안에 저토록 강건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니 한참을 걸어도어둠은 가시지 않고 가도 가도혼자 가는 먼 길 같지만 혼자였던 적은 없다먼 길이었던 적도 없다 - 우리는 멸종하지 않는다, 창비, 2026 ..

시와 감상 2026.07.29

보리쌀로 세운 시네마 천국 [유하]

보리쌀로 세운 시네마 천국 [유하]영글어가는 보리밭을 거닐며,이탈리아 영화에 나오는 소년 토토를 생각한다옛 공회당 건물에 들어선 자그만 극장이었지세월의 먼지 눌어붙은 사방의 벽과 삐걱거리는 영사기,노란 비 주룩주룩 내리던 화면, 나의 시네마 천국사랑만은 단 하나의 목숨을 걸었다북 치고 나팔 불며 샌드위치맨이 나타나면,난 광속으로 숨어들어가 보리쌀을 퍼담아 들고밤길을 달려 뛰는 심장으로 시네마 천국의 문을 두드렸다입장료 대신 보리쌀 한 되를 주고 보던신성일 엄앵란의 맨발의 청춘,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집어삼키며굵은 비 내리는 화면 속으로 질척질척 빠져들어가던그렁그렁한 눈동자들, 그리운 그 눈동자들……문희라는 이름의 멜로디 마지막 여운을 따라종다리 날아가고, 그 옛날의 눈물 바다고스란히 보리 이삭 속에 담겨..

시와 감상 2026.07.19

선풍기는 돌아가고 [김승희]

선풍기는 돌아가고 [김승희] 이 가혹한 지루한 여름미칠 것 같은 열대야의 밤아무나 나를 구원할 수 없는 시간에선풍기 바람이 돌고 있다누구지? 누구던가? 누구였던가?메일주소가 캄캄 kamkam이라는 이름이었는데얼마나 캄캄하면 인류의 웹 메일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려놓았겠는가?이미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처럼선풍기 날개가 돌고 있다순례자라고 하는가모기 모기 모기라고 하는가열대야의 밤에 땀이 흐르는데손으로 만져보니 모기 날개에 피가 흐르는데점점 더 나를 구원할 수 없는 시간에선풍기 바람이모기의 피를 흘리며 돌고 있고이미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이고소리와 단절된고난과 수도의 시간인데선풍기 날개의 놀라운 헌신과 열정뜨거운 몰입우산처럼 확 펴지는 환희의 바람어두운 하늘 아래서 무수한 별 아래서끝없이 걸어가는 순례자 ..

시와 감상 2026.07.18

이토록 긴 편지* [여태천]

이토록 긴 편지* [여태천] 당신이 말했다.여기는 비가 와요.거긴 어떤가요.낯선 말 한마디에도 꿈은 시작된다. 가만히 지나가는 비를세상의 지붕 위에서 기다리다니 당신은 또 이렇게 말했다.비가 와요, 비가혼자 있는 걸 알게 되면정말 슬프지 않을까요.나는 빗소리를 기록하는 일에모든 밤을 쓰기로 했다. 또박또박 초점 없이 떨어지는 비생각은 그렇게 앓기 시작했다. 무엇을 확인하려는 비처럼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처럼난 약한 사람들이닥치는 비처럼 숨이 차다.다정하다는 말이 타인 같다. * 마리아마 바의 소설 -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음사, 2020 * 시사랑 카페의 데네브였던 '비가와'님은 비가 올 때마다 생각이 난다.아마도 비가 오기만 하면 '비가와'님이 ..

시와 감상 2026.07.18

직박구리 [윤후명]

직박구리 [윤후명] 춘분 앞두고 직박구리를 만난다나뭇가지에 삐죽 붙은 새를나뭇가지로 볼 뻔했다드디어 봄이 왔구나지익 지이익 울음소리를 들은 것이다알고 보니 직박구리는 철새가 아니라 텃새였다그러니까 우리는 함께 이 땅에서 겨울을 난 것이었다서울의 새가 강릉의 새였다그랬단 말인가우리는 본래 함께였단 말인가어리둥절 눈인사를 보내는데직박구리는 낙숫물 한 방울에 주둥이를 적시고지익 지이익 나를 바라본다흘낏거리는 눈짓에 봄빛을 담고직박구리는 나를 바라본다봄이 지이익 지익 오고 있다 - 모루도서관, 문학과지성사, 2026 * 직박구리는 자주 만날 수 있는 새라고 보면 된다.동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새이기 때문이다.직박구리를 보려면 벚꽃이 필 때 벚꽃 구경을 가면 된다.직박구..

시와 감상 2026.07.05

참외 [유병록]

참외 [유병록] 아내와 내가잘 익은 참외를 들고 가다가바닥에 떨어뜨렸다 참외는 망가져서다시 주워 들 수가 없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나는 앞장서서 가고아내는 한참 머뭇거리다 뒤따라왔다 우리는참외의 기억을 들고 계속 걸었다 참외는 아니었지만참외의 기억에서도달콤한 참외 향이 났다 손에 든 게 뭐냐고누가 물으면 참외라고 답했다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우리는 참외 향을 맡으며 계속 걸었다 여기까지가아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들려준 꿈 이야기 참외를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우리는 이야기했다 차라리처음부터 참외가 없었으면 나았을까,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져주었다아직 참외 향이 나는 두 손으로 - 우리는 멸종하지 않는다, 창비, 2026 ..

시와 감상 2026.06.28

수행자의 노래 [이상국]

수행자의 노래 [이상국] 모차르트를 높여놓고 설거지를 한다세제 향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설거지에는 설거지의 도가 있어먼저 더운물에 그릇을 불리고거품을 일으켜 애벌 씻은 다음부드럽게 헹구고 물을 찌워마른행주로 닦아 말리면 뽀송해진 그릇들이 좋아한다어느 과정 하나 소홀하면 안 되고깊고 얕고 넓고 좁고 그릇에겐 그릇의 품성이 있어마땅히 예로써 존중해야 한다아내는 내가 설거지를 해놓으면 좋아한다어떤 때는 그릇에 얼룩이 그냥 있다거나냄새가 가시지 않았다고 해도그러한 지적으로 나의 공부는 나날이 깊어간다애들이 식기 세척기를 사준다 해도기계는 일은 알지만 살림의 도리를 모르고마지막으로 행주를 짜 널고바라보는 재계(齋戒)의 기쁨을 모른다어떤 날은 이 일 말고 하는 일이 없기도 하지만그릇을 닦는 일은 세상을 닦는..

시와 감상 2026.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