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1997

백색공간 [안희연]

백색공간  [안희연]    이누이트라고 적혀 있다 나는 종이의심장을 어루만지는 것처럼그것을 바라본다 그곳엔 흰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설원을 달리는 내가 있다 미끄러지면서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 글자의 내부로 들어간다 흰 개를 삼키는 흰 개를 따라다시 흰 개가 소리 없이 끌려가듯이 누군가 가위를 들고 나의 귀를 오리고 있다흰 개가 공중으로 흩어진다 긴 정적이단 한 방울의 물이 되어 떨어지는이마 나는 이곳이완전한 침묵이라는 것을 알았다 종이를 찢어도 두 발은 끝나지 않는다흰 개의 시간 속에 묶여 있다                 -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8         * 썼던 글이 '삭제' 를 누르지 않았는데도 삭제될 때가 있다.머릿속이 하얘진다.다시 그글을 떠올리며 써보지만 원래의 글과는 ..

시와 감상 11:32:56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신용목]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신용목]   열아홉의 내가  자신의 미래를 보고 싶어서  삼십 년을 살았다  내 미래는 이런 거였구나, 이제 다 보았는데  돌아가서  알려주고 싶은데, 여전히 계속되는 시속 한 시간의 시간 여행을 이제 멈추고  돌아가서  알려주면, 열아홉의 나  자신 앞에 놓인 삼십 년의 시간을 살아보겠다 말할까아니면  살지 않겠다 말할까  까만 먹지 숙제에 영어 단어 대신 써 내리던 이름과 아무렇게나 쓰러뜨린 자전거  바큇살처럼 부서지는 강물을 내려다 보며, 물은 흐르는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끝없이 뛰어내리는 거라고  생각하던 긴긴밤으로부터  나는 겨우 하루를 살았는데, 생각 속에서 삼십 년이 지나가고  넌 그대로구나  꿈에서는 스물하나에 죽은 친구가 나타나, 우리가 알고지낸 삼 년을..

시와 감상 2024.09.16

복희 [남길순]

복희 [남길순]      복희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개가 일어선다   개가 걷고  소녀가 따라 걷는다   호수 건너에서 오는 물이랑이 한겹씩 결로 다가와  기슭에 닿고 있다   호숫가를 한바퀴 도는 동안  내 걸음이 빠른 건지 그들과 만나는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는데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먼저 지나가라고 멈춰 서서  개를 가만히 쓸어주고 있다  희미한 달이 떠 있다   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 없다                  - 한밤의 트램펄린, 창비, 2024        * 매운 음식을 많이 먹어서일까?별것 아닌 일에도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해졌다.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는데 하루종일 쉬지않고 시끄럽다...

시와 감상 2024.09.13

달과 돌 [이성미]

달과 돌 [이성미]    돌이 식는다밤의 숲 속을 헤매다 주운창틀 위에 올려놓은 돌이 식는다어두운 방에서 빛나던 돌가만히 보면 내 눈썹까지 환해지던 그 둥근 빛 아래서나의 어둠을 용서했고침묵은 말랑말랑한 공을 굴렸다 들고양이가 베고 잤을까고양이의 꿈을 비누방울로 떠오르게 하던돌이 식는다 자줏빛 비가 내리고벼락의 도끼날이숲의 나무들을 베어버리는 동안돌 위에 얹고 있는내 손이 식는다 반달의나머지 검은 반쪽이궁금해졌다                -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문학과지성사, 2005         * 꿈도 사랑도 우정도 식어간다?돌이 가지고 있는 온기는 내가 유지해주지 않으면 반드시 싸늘하게 식을 게다.마음의 온기조차 식어간다면 돌뿐만 아니라 꿈도 사랑도 우정도 식어갈 게 자명하다.포물선을 그리는..

시와 감상 2024.09.08

이제와 미래 [여세실]

이제와 미래 [여세실]      분갈이를 할 때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빼야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였다 올리브나무가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잡아두는 것에는 재능이 없고 외우던 단어를 자꾸만 잊어버렸다   잎이 붉게 타들어간 올리브나무는 방을 정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흙에 손가락을 넣어보면 여전히 축축한, 죽어가면서도 사람을 살리고 있는 나무를 나는 이제라고 불러본다흙을 털어낸다 뿌리가 썩지 않았다면 다시 자랄 수 있을 거라고   이제야 햇볕이 든다  생생해지며 미래가 되어가는   우리는 타고나길 농담과 습기를 싫어하고 그 사실을 잊어보려 하지만  이미 건넜다 온 적 있지 뿌리를 넘어 줄기를 휘감아 아주날아본 적   양지를 찾아다녔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모종 하나를 화분에 옮겨..

시와 감상 2024.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