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저녁의 소리 [손택수]

JOOFEM 2018. 4. 17. 16:34









저녁의 소리 [손택수]






종소리는 내겐 시장기 같은 것, 담벼락이나 슬레이트 지붕 위에 올라가

고양이처럼 오도마니 웅크려 앉은 저물녘이면


피어나는 분꽃과 함께

어린 뱃속에서 칭얼대며 올라오던

소리와도 같은 것


그 굴풋한 소리를 그리워하며 살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만

야채 트럭의 마이크 소리가 골목을 돌고,

저문 여울 속에서 배를 뒤집는 피라미 떼처럼

반짝이는 새소리가 살아나고,

담벼락 위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간 옆집 누나의 숨 막히게 눈부신 종아리,

종아리처럼 하얀 물줄기가 화단에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오고


어쩌면 먼지 풀풀 날리는 소음으로나 그쳤을 이 많은 소리들을

종소리는 내게 주고 간 것이 아닌가

그 소리들도 멀어지는 종소리를 듣기 위해 가만히

멈춰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던


종은 찬장에 엎어놓은 밥그릇과 같아서,

나는 밥그릇을 하늘 위에 올려놓고 줄을 당기는 종지기가 되고 싶었는데

이상하다, 그 종소리가 내 귀엔 아직도 울리는 것이

종소리 없인 저녁이 오지 않는 것이



                                    - 시인동네, 2017 9월호







* 신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나는 거룩하다, 하였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다는 뜻이니

인간들아 나와 구별되지만 나를 닮으라 한 거다.

세상에서 살면서 어찌 신처럼 구별된 삶을 살까만은

흉내는 내면서 살려고 애쓴다.

종소리와 종아리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얼마나 많은 번민의 저녁을 맞이 하는가.

삶의 현장인 세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나며

얼마나 괴롭고 슬프고 화가 나는가.

종소리를 들으며 거룩에 가깝다가도

종아리를 보면 타락하는 것 같다가도

거룩과 안 거룩을 왔다갔다 하며 힘들게 힘들게 산다.


교회든 절이든 종소리를 자주 들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거룩쪽으로 기울지 않을까.

저녁 밥그릇에 두 손 공손히 올리고 거룩하게 공양하자.

거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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