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구백팔십년 학교 구내서점에서 칠백원주고 산 책이다.
이웃 사람 [김행숙]
곧 가스불을 꺼야 할 독신자가 갑자기 죽어버리
는 것이다. 고깃국이 졸아들고 검은 간장 한 방울
처럼 진해지는 것이다. 불꽃냄비처럼 모든 손잡이가
뜨거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란 가스
불을 끄고 그리고 시간이 남는다면 가볍게 음식을
먹고 천천히 그릇을 씻는 일이다.
나는 맨발로 국제공항에 떨궈지고 싶지 않았다.*
유리의 성에 지워질 듯 지워질 듯 어른거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익히고 익숙해지고
드디어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기까지 수줍
은 미소를 띤 채 어정거리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길
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 동네에서
오전에 산책하고 오후에 산책하는 나의 삶을 지키
고 싶다. 평범하고 고독한 저런 사람을 의심해야 한
다고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앞발을 감추고 발바리처
럼 짖을 때까지 나는 오후에 산책하고 고요한 새벽
에 산책하는 삶을 살아왔다.
제때 가스불을 끄고 사랑을 끄고 희망을 끄고 살아
온 것이다. 죽기 전에 해야할 일을 하며 살아온 것이
다. 곧 가스불을 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 어떤 젊은이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당신은 위에 있고,
나는 맨발로 국제공항에 떨궈져 있어요." 나는 다시 어떤 젊은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 에코의 초상, 문학과지성사, 2018
* 한 일간지 신문에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가 실렸다.
고속도로를 다니다 마지막휴게소 또는 마지막 주유소,라는 간판만 봐도
묘한 기분이 드는데 마지막 인터뷰라니......
이어령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국민학교 육학년 때다.
우리집에 웬일로 이어령의 "흙속에 저 바람속에"라는 책이 있었다.
그땐 닥치는대로 책을 읽던 때라 그책을 읽었었다.
글도 명문장이려니와 철학적인 것이기도 해서 지성인의 최고봉으로 생각했다.
사십여년간 이 땅에 같이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영광이다.
죽기 전에 가스불을 끄듯 마지막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소회를 남긴 이어령 선생.
그의 제자들은 그의 싸늘한 눈빛이라 했지만 나는 번득이는 지성이라고 믿는다.
그 어느 철학자도 그 어느 문학자도 그 어느 사회학자도
이어령 선생보다 더 통찰력을 가진 사람을 본 적 없다.
부디 더 오래 이 땅에 발붙이고 사시길 바라고 가스불 끄기 전에 주옥같은 글로
더 많은 흔적을 남겨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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