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로 자라는 방법 [유희경]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두 눈이 빨개지고
두 손이 비어 아플 정도로
아무도 아니었다
나무가 애석한 까닭에 대해서
남자도 새도 가지도 방금,
지워질 듯 떨어져버린 잎도
할 말이 없다 대개 그렇듯
잠시 어떤 시간이 지나간다
남자는 나무를 심지 않았고
나무의 둥치를 만져본 적 없고
몸을 기댄 적 없지만
남자와 나무의 속도는 같다
그것은 당신이기도 하고
당신이 아닐 수 없기도 하다
당신이 남자와 나무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러하다
방금 떨어진 것은 나무의 잎맥이고
나무의 전생이며 지독하게
갔다가 돌아올 남자의 일상이고
무표정한 당신의 민낯
한 남자가 있고 한 그루
나무와 당신
아주 멀리 떨어져서
아무도 아무것도 아닐 만큼
어떤 시간이 지나가도 나도
모르고 있을 그만큼의
- 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 아침달, 2017
* 이십년 넘게 시 카페에서 시를 즐기고 사랑했다.
시민으로 인생의 절반을 보냈는데 카페는 나무와 같지 않아서 해마다
잎맥도 떨어지고 인맥도 떨어진다.
시 카페가 몇 안되었을 때는 카페가 북적였고 가지와 잎이 무성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취향으로 나뉘었다.
아직도 인맥의 흔적으로 폰에 번호가 저장된 이들이 많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거리는 상당히 다르다.
대추나무는 해마다 열매를 더한다지만
느티나무는 해마다 잎이 무성해진다지만
나무와 같지 않은 사람들은 그 인연이 점점 희미해진다.
시는 있으되 사랑이 없어져서 나무와 같지 않은 카페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오늘도 보탑사의 주페나무는 나에게 詩와 사랑을 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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