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시나 써라 [박노식]

JOOFEM 2022. 10. 1. 08:38

 

 

 

 

 

시나 써라 [박노식]

 

 

 

 

면접을 치렀습니다

주유소 주유 아르바이트였지요

사무실 구석진 의자에 앉아 믹스커피에 입술을 적시면서 긴장을 풀었죠

소장이 첫 질문을 던졌습니다

"할 수 있겠어요?"

"네."

다부지게 대답했죠

근데 나의 눈이 자꾸 밖으로만 향하는 거예요

주유기 여섯 대는 쉴 틈이 없고

직원 둘은 신용카드나 농협상품권을 들고 사무실 계산대를 팔랑개비처럼 드나들고,

행락철이기도 했지만

이 부산한 계산 앞에서

나의 느린 걸음과 자주 몽상에 젖는 버릇이 오히려 슬프게 다가왔어요

소장의 억양을 따라가면서 좀 주눅이 들기는 했지만,

"며칠 전에도 이틀 만에 그만둔 사람이 있었는데 견딜 수 있겠어요?"

아, 이 말은 나를 그늘 속에 들게 하는구나 싶어 순간 불안이 찾아오더군요

옆에서 지켜보던 젊은 계장이 거들었어요

"오늘 밤에 생각해 보시고 낼 연락을 주는 게 낫겠네요."

양 어깨 위로 밤송이 수십 개가 내려앉은 듯해서 조심스런 걸음으로 나왔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 길가의 흰 꽃잎들이 무수히 날려서 나를 위로해주었답니다

마을 입구에 이르러 불현듯 착한 애인의 말이 떠오르더군요

"시나 써라."

 

                - 마음밖의 풍경, 달아실, 2022

 

 

 

 

 

 

* 그옛날, 석기시대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은 동굴에 살며

낮에는 돌창을 들고 나가 멧돼지나 사슴을 잡아먹었을 거다.

근육에 힘 없고 몽상만 많은 인간은 창던지기가 서툴러 매일 쫑코나 먹다가

동굴에 눌러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지어 부르거나 딴짓을 했을 거다.

창던지기를 천일동안 했다면 어느 정도 능숙해지긴 한다.

만일동안 하면 장인이거나 달인 정도는 된다.

천일이라면 햇수로 삼년이요, 만일이라면 거의 삼십년이다.

뭐, 동굴에서 딴짓을 천일동안 한다면 지금으로 치자면 가수나 시인은 될 거다.

삼년동안 눈 딱 감고 주유일을 하면 능숙하게 할 수 있을 텐데

그 삼년을 채우기가 벅찬 것이다.

서당개도 삼년을 해야 풍월을 읊는다.

무슨 일이든 삼년은 해보고 그래도 안되거든 다른 일을 하고

기왕에 한 일이라면 악착같이 해보아야 한다.

시인들이 들으면 '뭐야?'하겠지만 '시나 써라.'는 말은 종주먹을 쥐게 할 것이다.

시인이 평소에 시를 쓰고 착한 애인에게 보여주니 좋아하고 잘 쓴다고 칭찬칭찬을 주니

그말에 점점더 몽상이 많아졌을 게다.

아마 시인들도 소질이 다분히 많으면 천일 동안 써서 시인이 되었거나

소질이 없더라도 노력노력해서 만일동안 써서 시인이 되었거나 했을 게다.

 

친구야, 시나 써라.

- 뭐라꼬? 뭐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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