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더미만큼 쌓인 사과 [김복희]
세상에 둘뿐인 고아처럼
철수와 영희는 사과를 나누어 먹거나 등교하거나
운동장을 달린다
철수와 영희들을 놓고 불이 번지는 속도와 불길의 방향을 구하고
둘이 만날 수 있도록 반대방향으로 다른 속도로 달리기를 시키라
가죽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냥꾼의 딸처럼
가족의 죽음에 운율을 만드는 가인처럼
올해도 겨울은 길구나, 말고기 꿩고기 말린 것을 씹으며
눈 위에 난 발자국을 쫓아다니고
철수와 영희라는 이국의 이름들을 친구로 한다
사과가 굴러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바보 같은 친구들
내가 구할 답을 기다린다
나는 너희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
너희를 잊을지도 모르는데
거대한 고아원 문을 비틀어 열자마자
그 문 바깥으로 쏟아진 사과
썩어서
싹을 틔운다
- 희망은 사랑을 한다, 문학동네, 2020
* 성경책 맨앞에는 아담과 이브가 나오듯
국민학교 저학년 책에는 철수와 영희가 나왔다.
주인공 이름은 철수와 영희가 될 수밖에 없지만
사실 그렇게 많았던 이름은 아니다.
철,자가 든 이름이 많긴 했고 여자아이들은 자,자가 많았다.
영자 숙자 민자 옥자 말자
요즘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누가 등장할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요즘은 옛날 이름에서 점을 빼서 영지 숙지 민지 옥지 말지,라고 할라나.
이름이 촌스러워 개명을 한 사람도 많고
특히나 요즘 엠지세대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에 거부감이 들어 몰래 개명한다.
아주 옛날에는 부모가 물려준 머리카락도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하여 자르지 않고 보존했는데
요즘 그딴거는 없다.
요즘 아이들은 세상에 하나뿐인 고아처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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