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당신의 골목 [이대흠]

JOOFEM 2025. 1. 17. 12:11

 

 

 

 

 

당신의 골목 [이대흠]

 

 

 

 

  오래된 골목은 살아 있습니다 꿈틀거리고 쉬지 않고 자라

납니다 모방할 수는 있지만 재생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기

하학을 동원하더라도 설계도를 그리는 것조차 불가능합니

다 더군다나 골목에 묻어 있는 손때나 숨결 같은 것은 과학

수사를 하더라도 밝혀낼 수 없습니다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은 오래된 골목이 내게는 있습니다

풍경을 체포한 나는 오히려 풍경에 갇힙니다

 

  여기 이곳인 골목을

  쉽게 당신이라고 명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골목에 눈이 내리고 가로등 불빛이 제 발등을 쫍니다 버

려진 음료수 뚜껑 하나에도 그냥은 없습니다 당신이라는,

이 오래된 골목에서

 

  나는 기꺼이 아포페니아의 신도가 되어갑니다 당신의 속

삭임 같은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면 슬픔의 출처를 알 수도

있겠습니다

 

 

                    - 코끼리가 쏟아진다, 창비, 2022

 

 

 

 

 

 

 

 

 * 일천구백칠십사년 중학생인 나는 신문배달을 하였습니다.

동아일보 팔십부를 돌리다 나중에는 백오십부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좁다란 골목길을 누비며 신문을 휙휙 던지곤 했습니다.

확장지라고 빨간 도장이 찍힌 신문은 두,세부를 행인에게 주기도 하지만

시장에서 어묵 파는 아주머니에게 한 부 드리면 맛있는 어묵 두 개를 받았습니다.

좁다란 시장골목은 좁다란 하늘을 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시장에 뚜껑을 씌워서 비를 피할 수 있지만 그땐 비를 맞아야 했습니다. 

나의 그 골목은 백오십부를 다 배달하고 빈 손이 되었을 때의 그 홀가분함과

학비를 낼 때의 뿌듯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래된 시장골목은 아직도 에누리를 주고받는 정으로 따뜻할 것입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의 이야기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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