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집 명자꽃 더미 앞에서 [장석남]
잘못 살았나봐
같이 볼 이 없는
찬란한 이 꽃 더미 앞이라니!
반 웃고 반은 접는다
왜 없었겠냐만
지금은 쑥밭에 길을 내어 그것만이 나의 동무
붉은 그늘 가시 저편 잉잉대는 수만 벌들의 잔치
나는 모르는 세상 잔치도 많았겠지
혼자의 흐린 만찬이 나는 잦았지
찬란한 꽃 그대로 두고 물러나려니
느린 걸음 느린 걸음 아픈 그림자
옛날 어느 봄도 그런 일이 있었던가봐
늦은 점심 뜨는데
국그룻에 자꾸만 꽃잎들이 날려 와 빠져서
여러 봄을 한꺼번에 삼키네
- 내가 사랑한 거짓말, 창비, 2025
* 삼월에 피는 꽃은 다름 아닌 회양목 꽃이다.
우리 눈엔 띠지 않지만 겨우내 기다렸던 벌들은 미친듯이 달려와
꿀을 쭉 쭉 빨아대는 요즘이다.
명자꽃은 앞으로 한달쯤 지나야 붉은 꽃을 피우고
벌들을 불러 잔치를 열 것이다.
시사랑 카페 회원이었던 홍시인은 자기 가게 뒷골목에 명자나무를 심고
환하게 웃었던 것이 기억 난다.
십오년이 지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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