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필惡筆[이정록]
월남전 다녀온 해부터
고엽枯葉의 떨리는 손으로 쓴 일기장,
그의 영정 아래,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져 있다.
"염주는 가슴 쪽으로 굴릴 수밖에 없다.
시계 반대 방향이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다.
죄가 크다. 두고 온 아들이 눈에 밟힌다."
악필이 더 있다.
흰 페인트로 대문 앞에 써 놓은 주차금지,
차주가 돼 본적이 없으니 필적만 주차시켜 왔다.
담벼락에 써 놓은 소변금지, 가위는 한껏 녹슬어 이가 빠졌다.
페인트 글씨도 폐인이 되었다. 초록대문에 쓴 개조심,
육 개월 만에 잡아먹었으니 붉은 개조심만 남았다.
악필 중에 악필, 정말 으르렁대는 듯하다.
하나 더 있다
백열전구에 매달아놓은 우체국통장.
표지에 써놓은 유언,"비밀번호는 네 생일이다.
장례 치루고 남은 돈은 엄마 드려라."
어찌, 아들을 찾아 상복을 입힌단 말인가?
또 있다. 부의賻儀나 조의는 없고
삐뚤빼뚤 이름자만 쓴 봉투 몇, 한결같이 악필이다.
봉투의 여백이 시베리아 등짝이다.
악다구니 셋이 소주를 마시고 악필 다섯이 고스톱을 치는
추운 밤이다. 인력시장에 나가봐야 한다고,
컵라면에 덜덜덜 뜨건 물을 붓는
문상 問喪 이틀째 새벽이다.
한일 두이 석삼 여덟팔
주름살만은 추사체秋史體다.
면면 面面, 명필名筆중에 명필이다.
* 악필이라,하면 나도 한 몫하는데 날아간다고 할까, 날려쓴다고 할까, 기어간다고 할까,흘겨쓴다고 할까,
어쨌거나 또박또박 쓰는 글씨는 아니고 그렇다고 괴발개발은 아닌 편이다.
노래를 잘 못해서 영어로 노래부르면 잘 부르는지 못 부르는지 모르듯이
대체로 한자를 섞어서 쓰면 대강 악필을 감출 수 있다.
왕휘지체는 아니고 내 글씨체는 지렁이체에 가깝다. 혹은 휘지비지체.......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일들[심보선] (0) | 2009.08.23 |
---|---|
길상사를 걷다[이가을] (0) | 2009.08.23 |
붉은 우체통[황지우] (0) | 2009.08.17 |
저곳[박형준] (0) | 2009.08.08 |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이진명] (0) | 2009.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