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좋은 일들[심보선]

JOOFEM 2009. 8. 23. 20:26

 

 

 

 

 

 

 

좋은 일들[심보선]

 

 

 

 

오늘 내가 한 일 중 좋은 일 하나는

매미 한 마리가 땅바닥에 배를 뒤집은 채

느리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준 일

죽은 매미를 손에 쥐고 나무에 기대 맴맴 울며

잠깐 그것의 후생이 되어준 일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그것 또한 좋은 일 중의 하나

태양으로부터 드리워진 부드러운 빛의 붓질이

내 눈동자를 어루만질 때

외곽에 펼쳐진 해안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그때 나는 좋았던 일들만을 짐짓 기억하며

두터운 밤공기와 단단한 대지의 틈새로

해진 구두코를 슬쩍 들이미는 것이다

오늘의 좋은 일들을 비추어볼 때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조금 위대한 사람

나의 심장이 구석구석의 실정맥 속으로

갸륵한 용기들을 알알이 흘려보내는 것 같은 착란

그러나 이 지상에 명료한 그림자는 없으니

나는 이제 나를 고백하는 일에 보다 절제하련다

발아래서 퀼트처럼 알록달록 조각조각

교차하며 이어지는 상념의 나날들

언제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투성이

언젠가 운명이 흰수염고래처럼 흘러오겠지

 

 

 

 

 

 

 

 

 

* 오늘 내가 한 일 중 잘한 일 하나는

시인 심보선의 性을 바로잡은 것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초,란 시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보선시인을 그동안 여자로만 알았다.

아마 지선이, 희선이,미선이 같은 여자이름을 연상해서 그렇게 헛다리를 짚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일들,이란 시를 읽다가 그녀(?)가 남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젊은 시인인데다 대개 자잘한 슬픔을 노래하기에 여자일 거라는 편견을 들이댄 거다.

젊은 남자가 슬플 겨를이 없을 텐데 슬프다는 것도 그렇고 대개 슬픔은 감성이 예민한 여자의 전유물일 거라는 전근대적인 나의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그러므로 반성한다. 남자도, 젊은 남자도 슬픔을 노래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을......

 

한 마리의 매미가 죽으면 슬플까?

열 마리의 매미가 동시에 죽으면 슬플까?

그리고나서 다시 백 마리의 매미가 죽으면 슬플까?

오늘도 죽고 내일도 죽고 모레도 죽는 매미

아니, 내년 이맘때에도 죽어자빠질 매미들을 슬퍼할까?

애완매미도 아니었을 텐데 시인은 슬퍼하고 그 놈의 후생조차 되어주면서 좋은 일이라고 자처한다.

시인은 열살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하는 거라고 알고 있긴 하지만

운명이 흰수염고래가 흘러오듯 오는 거라고 믿는 것은

마치 죽은 한 마리의 매미가 내세에 환생할 거라고 믿는 것과 같은 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한 마리의 매미가 죽은 걸 슬퍼하는 심보선은 시인이요,

그 시를 읽고 왜 슬플까 궁금해 하는 나는 시를 읽는 독자이다, 라는 결론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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