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중독성 슬픔[권현형]

JOOFEM 2010. 5. 10. 19:21

 

 

 

 

 

 

중독성 슬픔[권현형]
 
 
 
그녀의 두개골 속엔 반쯤 닫히다만 검은 서랍이 끼어있는 듯 했습니다 아구가 맞지 않아 바람불 때마다 낡은 풍금을 켜대던 서랍, 그 덕에 어릴 적 나는 약방문을 닳도록 들락거렸지요 골이 울린다고 날카롭게 쇳소리가 골을 긁는다고 눈깔사탕 사러 보내듯 심심찮게 보내던 할머니의 두통약 심부름길, 주머니 속 동전을 잘그락거리며 댕동댕동 잘도 뛰어다녔지요

어느새 심부름 길은 저물어
할머니도
끝없이 뇌신을 채워 넣던 서랍도
그 길 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할머니? 어쩌자고
이젠... 뇌신이 ...제게 뇌신이 ...필요해요
어릴 때부터 닦아 놓은 길
악마같은
슬픔에 중독되어 버렸거든요

 

 

 

 

 

 

* 뇌신이란 말은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어릴 적, 두통에 시달리던 아버지의 약심부름으로 이 약을 사러다녔다.

뇌신보다는 명랑을 더 즐겨 샀다.

이름이 아픈 머리를 새롭게 하거나 명랑하게 만든다는 뜻 같은데

지금으로 치면 사리돈이나 펜잘을 프레스로 누르기 전단계의 가루약이다.

하얀 종이에 접힌 채 속에 들어있던 하얀 가루약.

나도 가끔 연탄가스 맡으면 골치가 아파서 먹던 약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중독성 슬픔을 가지고 사셨던 것 같다.

아아, 지금이라도 이 약을 먹고 명랑해지거나 머리가 새로와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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