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줄타기 곡예사(曲藝師) [성찬경]

JOOFEM 2010. 6. 16. 21:01

 

 

 

 

 

 

 

줄타기 곡예사(曲藝師) [성찬경]

 

 

 

 

 

휘청휘청 끊길 듯 팽팽한 줄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정신은 소멸하고

그 위에 수직으로 세워진 신경이

칼날 같은 안식처를 찾아서 찾아서 떨고

그 명령을 받아 역시 미시적(微視的)으로 떨리는

한걸음 한걸음이

태(胎)에서 무덤까지의 도정(道程)처럼 멀구나.

그러면서도 그것은 긴 절규처럼 일순이다.

그런 속에서 곡예사는 웃는다.

밑에서 장단꾼이 업! 하면 업! 하고

여! 하면 여! 하고 화답하긴 하지만

그러나 곡예사는 외롭구나.

풍랑 속의 쪽배처럼 외롭구나.

줄을 뒤로 뒤로 흘려 보내는

곡예사는 시시각각 꺼꾸러지지 않고

곡예사는 시시각각 기적이구나.

이때에 줄이 탁 끊어지지 않는다는 우연의 정체를,

갑자기 발에 쥐가 나지 않는다는 우연의 정체를,

질풍이 난데없이 휘몰아치지 않는다는 우연의 정체를,

이 모든 정체를 곡예사는 모른다.

능동의 고비를 넘어

순수한 피동 속에 내맡긴 곡예사는

이 깊은 낭떠러지 위에서

그처럼 신기하게 안전하구나.


곡예사여. 곡예사여.

이윽고 목숨의 유희를 마치고

갈채 속에 무대 뒤로 사라지는 곡예사여.

이제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대의 수고를 치하하는 이들의 따뜻한 품 안이냐?

아니면 그런 것이 오히려 번거로와

화장도구(化粧道具)와 못난이역 의상 따위가 황량하게 널려 있는

어느 구석 삐걱이는 의자 위에

아아, 하고 쓰러지며 부르는

쓰디쓴 망각이냐?

 

 

 

 

 

 

 

* 팽팽하게 당겨진 줄은 분명 직선인데

그 줄 위로 걷는 곡예사는 아칫아칫 곡선을 가는 듯 하다.

삶은 분명 똑바로 가라고 가르치지만 절대 똑바로 갈 수 없다.

(누가 절대,라는 말은 절대 쓰지말라 했는데.)

비척비척 걷는 길이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고

죽을 수도 있는 개연성 위를 우연의 정체가 생명을 인도한다.

다 지나가고서야 갈채를 받지만 사라져야 한다는 거,

쓰러져야 한다는 거,

그리고 다 망각해야 한다는 거......

 

외로운 한 줄위에서 곡예사 또한 외롭고 무섭구나.

한갓 일장춘몽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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