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았거나 놓쳤거나 [천양희]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 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뿐이다.
물에도 결이 있고 침묵에도 파문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이 무서운 건 마음이 있어서란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듣듯 한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물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손가락으로 그걸 눌러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쓰고야 말겠다.
* 주페가 좋아하는 천양희시인이다.
놓았거나 놓쳐버린 삶. 그게 어느 쪽이었든지 그건 그냥 삶의 한 단편이다.
사람이 무서운 건 정말이지 마음이 있어서이다.
마음은 해마다 혹은 날마다 같은 것이 아니므로 편재와 부재, 둘이 서로 번갈아가며 존재한다.
믿음, 그 놈 참 부질없는 것이기도 하다.
놓았든 놓쳤든 슬픈 일이라면 슬플 수도 있고 기쁜 일이라면 기쁠 수도 있다.
믿음을 가지고 평생 살 수 있다면 완전한 '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완전한 '나'가 될 게다.
참된 자아를 찾아서 오늘도 삶은 여행이 된다.
놓았거나 놓쳤거나 나는 나일 뿐이다.
삶의 끈은 놓아서도 안되고 놓쳐서도 안된다.
그게 아니라면 놓아도, 놓쳐도 거리낌은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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