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애인은 모두 옛 애인이지요[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속에 써 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순 없어요.
지나가는 모든 것과 다가오는 그 모든 파도를 나의 바다라고 부를 순 없어요.
이세상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 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 구절초같은 사랑은 늘 마디가 있다.
마디마디마다 굵고 흉한 자국이 남는다.
하지만 마디를 통해서 바로 선다.
인간은 누구나 이처럼 독립을 꿈꾸지만 펄럭이는 깃발을 세우려는 꿈도 꾼다.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인 사랑이어도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듯
사랑은 늘 그렇게 다가온다.
바다에서 보니 이 세상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 된다.
바람 참 차더라.
맥주 거품같은 파도.
하늘은 겨울스럽게......
깃발은 세웠지만 바람이 없을 땐 무미하다.
물고기도 다 잡는 때가 있는 법이다.
밧줄과 밧줄로 이어진 관계.
언젠가는 폐선이 된다.
사랑을 가득 담아 짭쪼롬했을 때도 있었던 게다.
깃발을 세우고 미친듯이 퍼덕거릴 때도 있다.
어락 못지않게 갈매기의 몸놀림도 유유자적이다.
깃발을 세운 어선들......
바람이 곱게 쓸어넘기는 중.
파도와의 만남이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아니다. 모래라고 다 파도에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
맥주에 노가리 한 마리, 마시고 싶다. 철지난 바닷가엔 사람이 없더라.
조개의 삶도 한때는 찬란했을 게다. 지금은 모래무덤속에......
바람에 춤추는 것은 깃발만이 아니다. 억새도 바람에 눈부시다.
저 너머 바다에는 옛 애인이 산다.
넓은 바다에서 고운 모래가 밀려온다.
학꽁치를 잡아먹던 때가 있었다. 거꾸로 타임에 도망다니던......기억의 단층.
뜬금없는 아파트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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