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

시인 [김수우]

JOOFEM 2011. 12. 17. 09:26

 

 

 

 

 

 

시인 [김수우]

 

 

 

 

A4용지 두어 권 책상 밑에 쌓아놓고

겨울숲을 관장하는 사람처럼 우쭐거린다

유일한 사치는 진한 커피냄새,

커피잔 들고 낡은 화분에서 깨알만한 잎눈 하나 마주치면

고대 식물학자나 된듯 형편없이 교만하다

 

손목에 달라붙던 도깨비바늘도 잊고

세 끼 달아 먹은 라면도, 밤새우고도 완성 못한 시도 잊고

주눅만 주는 서울도 문단도 다 잊고

 

몸속 실핏줄 다 풀어놓은 한 마리 거미가 된다

자갈이 된 쥐들의 이빨과

가끔 떨어진 새들의 영혼을 받아든다

지루하면 유목민의 딸답게 먼지의 발꿈치를 따라 다닌다

마을버스를 타고 가시덤불 떠도는 사막을 찾아간다

 

다시 지루하면 제 속에 밥을 먹여주는 망상들

저가 믿거나 저를 믿는 귀신들과 쪼그려 시시덕거리다

두부김치 한 접시에

이 삐딱한 세상을 한참 용서하고 만다

 

목에 박인 불화의 생선가시도

만만하게 견뎌낸다

편형동물의 진화된 눈처럼 겨우 빛과 어둠 구분하는 주제에

 

매일매일 자라는 초식동물의 뿔, 큰 뿔

저 대책없는 오만

 

 

                                                             - 시안 2011겨울호에서

 

 

 

 

 

* 시인이 그냥 시인이 되는 건 아니다.

나름 삶의 아픔과 슬픔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관용할 수 있어야 시인이 된다.

그만큼 인생철학이 확고해야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며칠전 한 친구가 등단했다고 어떤 잡지를 들고 왔다.

그 친구의 처지를 잘 아는 터라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게 새로울 건 없었다.

아들은, 아내는,노부모는 다 떠나가고 딸까지 시집가버린 마당에

욥기를 하나 더 쓸만큼 고통스러운 삶이니 고단하기도 하였을 테다.

마침내 시인으로 등단하는 길을 택한 건 더이상 사막을 떠돌지 않으려는 것일 게다.

이제 혼자 사는 몸이니 홀로인 식탁, 홀로인 컴퓨터, 홀로인 화분을 껴안고

형편없는 교만도 부리고, 대책없는 오만도 부리면서

홀로인 세상에서 왕노릇하길 빈다.

시인이라는 가시면류관 하나 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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