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됐어 [문정희]
이제 됐어!
도롱뇽 새끼처럼 연약한 동물로 태어나
제 발로 서서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됐어
슬프게 기뻐
빛나는 고통이었어
위대한 빗금을 새겼어
때로 술통이 숨통이었지
하늘의 힘줄 뻗어가는 구름의 시간
미끄러운 신의 점액질처럼
푸른 이끼가 자라는 숲 속의 길들
고요를 머금은 폭설 속에서도
기필코 피는 꽃을 보아버렸어
수천의 이빨을 숨기고 떠 있는 솔개들을 알아버렸어
이제 됐어!
모든 사랑은 나중에 오는 사랑에 지는 법*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니까
그냥 가벼이 손을 흔들 거야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일까
더 이상은 진정 모르겠어!
* 하랄트 바인리히, "망각의 강 레테"
* 한,두 시간동안에 벌어지는 경연인 나가수,나 불후의 명곡을 보면
앞에 부른 가수보다는 뒤에 부른 가수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그 짧은 순간에 앞에 부른 가수의 열창을 망각하는 까닭이다.
망각의 강, 레떼의 물을 퍼마신 것도 아니건만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다.
모든 사랑이 나중에 오는 사랑에 지는 것도 그런 까닭일까.
앞선 사랑이 하얗게 잊혀지는 걸까.
기필코 나중 온 사랑의 꽃이 피고야 말았으니 이제 됐어!라고 양희은풍으로 힘주어 말해야 하나.
마음이 가는대로 가벼이 손을 흔들고 그걸 사랑이라고 믿으며 사는,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더 이상은 모르겠다며 지금,여기서(Here and Now!)를 외친다.
때로는 레떼의 강물을 퍼마신 것이 고마울 때도 있다.
망각없이는 괴로운 일도 많을 테니까......
앗싸, 이제 됐어! 내일일도 난 몰라요,가 될 만큼 현재는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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